"너 또 안 나올 거야?(你又不出来吗?)“
"아냐. 나갈게. 애 맡기고 혼자 나갈게. 저녁에 보자."
아이비에커는 3일 전 혼자 나올 수 있냐는 말을 거절한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인상을 팍 쓰면서 낮은 어조로 말했다. 너 또 안 나올 거야. 그 말에는 나는 너를 소중히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치한 취급하며 피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간다고는 했지만, 저녁에 그와 둘이 만날 수는 없었다. 회사를 13년간 다니면서 터득한 기술은 바로, 담당자가 되면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숙제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어정쩡한 사정을 풀어야 할 담당자는 내 자신이었다. 바허에게 전화했다.
"바허!"
"에이~ 타슈켄트온거야?"
20대 내 우즈베키스탄 절친 바허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역시 바허는 내가 타슈켄트 돌아온 걸 모르고 있었다. 아이비에커가 이번에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나 내일 우즈베키스탄 떠나."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너가 9월 7일에나 간다는 줄 알고, 그 전에 우리 가족들이랑 좋은데도 놀러가고 그러려고 했는데. "
다정하고 착한 나의 바허는 나의 작별메일을 무뚝뚝하게 씹은게 아니었다. 그저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말에 상처가 조금 아물었다. 나는 마음을 활짝 열고 바허에게 털어놓았다. 고민이 있을 때 나는 남편에게 털어놓곤 하는데, 우즈베키스탄에서 남편만큼 편한 사람은 바로 바허였다.
"바허, 오늘있잖아. 아이비에커가 글쎄 나한테 화낸 거 있지. 진짜 너무 당황했어."
바허는 내 이야기를 한동안 듣더니 여전히 다정하게 말했다.
"야. 걔가 화낼만 하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친구잖아. 네가 우즈베키스탄에 익숙하지도 않고, 돈이 다 떨어졌으면 바로 연락했어야지."
바허는 애정이 섞인 질책을 했다. 바허도 안다면서. 나랑 아이비에커랑 과거에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나의 곤란한 입장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또 여자가 스스로 문제 해결하는 것에 손뼉 쳐주지 못할 망정, 측은하게만 본다니... 어쨌거나 나는 정신을 다시 부여잡고 말했다.
"이따 저녁에 아이비에커랑 볼건데 너도 올래? 헤어지기 전에 얼굴 보자. 내가 밥 쏠게."
"아.. 나 지금 친척이 입원해서 타슈켄트 외곽의 병원이야. 늦게라도 갈게. 일단 둘이 만나고 있어."
저녁에 일끝나면 온다던 아이비에커를 기다리며, 나는 에어컨이 나오는 호스텔 방 침대에 가로누워 내가 근사하게 쏠 레스토랑을 검색하고 있었다.
아이비에커가 몇시에 온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대충 6시라고 생각하고 나는 화장을 했다. BB크림을 바르고, 볼터치도 하고, 립스틱도 발랐다. 가장 정중해 보이는 감색 원피스도 입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채로 나는 엄마와 주원이가 저녁으로 먹을 미역국과 밥을 만들었다. 어차피 저녁에 아이비에커와 바허와 같이 먹을 거라 엄마와 주원이만 상 차려주고 나는 먹지 않았다.
바허가 온다는 소식을 아이비에커에게 미리 전하면, 나와 둘이 만나고 싶어하는 아이비에커가 화내려나
"오늘 마지막이라서 내가 바허도 불렀어. 병원에 있다가 늦게라도 온다고 하네. 우리 저녁에 다같이 만날 곳으로 힐튼호텔 루프탑 골라봤어. ㅎㅎ 내가 카드로 근사하게 쏠게. 이따 봐. ^^"
나의 상냥한 문자에 아이비에커는 답이 없었다. 6시는 이미 훌쩍 넘었다. 그렇게 7시가 되고, 8시가 되었다. 외출준비한지도 2시간이 흘렀다. 점심때 아이비에커가 사준 중국볶음면이 나의 마지막 식사였다. 배가 고팠다가, 신경이 쓰여서 배가 안 고팠다가, 이런 처지에 놓인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화가 났다. 바쁘면 오지 말 것이지. 왜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