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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08. 2024

지구 탈출 속도로 상상하는 법

소설

그가 내게 말해주었다. 

강철 같았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고.

나는 수줍음을 감추려 책을 펼쳤다.

그에게도 그런 시간이 끝났으면 했다.




  5. 지구 탈출 속도로 상상하는 법     


  꿈을 꾼 듯 해. 나는 중얼거렸다. 밖을 보니 안개가 걷히고 은색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나이 어린 구름일까, 나이 든 구름일까. 어떤 색은 세대 불문으로 사랑받는다. 은색은 그런 색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친구 수환의 새치 가득한 머리도, 중환자실에서 본 외조부의 회색빛 은발도 내게는 예쁘고 애틋했다. 그런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본래의 색을 잃지 않는다.  


  구름은 어떤 느낌일까. 과학은 응결된 수증기의 집합이라고 구름을 정의해 두었지만 눈으로 본 구름은 정반대의 낭만을 품고 있었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그런 자유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어긋난 가정을 뒤적거려 보았다. 생산적이진 않지만 흥미로 가득한 상상이다. 그리고 분명 두려워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환한 빛이 은색 커튼 뒤로 비쳤다. 날씨가 말끔히 갤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곳을 떠날 상상을 한다. 그래봐야 지구 안쪽이겠지만. 아직 지구 탈출 속도로 상상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걸 가르쳐 줄 사람을 알게 됐다. 그 사실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   


  자동차들이 줄지어 지나갔고 나는 나와 상관없는 시공간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입술과 입천장과 목젖이 잠시 축축해졌다가 이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답답함의 누적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런 날의 정신에서는 출고 후 단 한 번도 에어컨 필터를 교체하지 않은 자동차의 퀴퀴한 냄새가 난다. 정신은 갈아 끼울 수 없으므로 일단은 그 퀴퀴함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얼마가 걸리든.


  나는 꿈이 없다. 여기에 '현재로서는'이라고 덧붙인다. 변화가 더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중이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란 사람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좋게 말하면 한결같고 나쁘게 말하면 정체가 심했다. 무언가를 추구하지도, 있던 걸 내버리지도 않는다. 물건이나 옷을 사면 망가질 때까지 쓰고 그러고 나면 그 시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로 산다. 나이테가 한 겹 늘어도, 십 단위 숫자가 변해도,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거나 우울증을 앓아도,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미치도록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큼은 아니다. 내 마음과 이성과 영혼을 꿈에 새기는 일이 어렵다는 걸 조금은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반대이거나.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의 각오를 다진다. 이건 삶의 기본 명제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하루치 의지를 삶에 얹어두는 것이다. 배고플 때 먹으려고 남겨둔 하리보 젤리나 손님이 먹다 남긴 호두파이, 지갑에 꽂아 둔 사과맛 콘돔처럼. 꿈을 새기는 일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카페지기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 3년은 그랬다. 하루하루 버티는 일을 최선의 명제로 삼는 것. 그 이상을 바라면 많은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카페지기의 80% 이상일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기다리는 일과 시간을 쌓는 일, 누적된 시간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는 일, 이 3가지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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