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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07. 2024

카페인 중독의 최후

소설

  네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너는 모래에 발자국을 새기며 내게 달려왔다.

  나는 팔을 벌려 너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4. 카페인 중독의 최후     


  안개가 짙은 출근길이었다. 반경 50m 남짓한 공간을 제외하면 사방이 빽빽한 안개로 뒤덮여 있다. 건너편에서 자동차들이 나를 놀라게 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오히려 시야는 더욱 좁아졌다. 


  겨울 안개는 흔치 않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겁게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교통법규 상 악천후에서는 제한 속도보다 20% 더 감속해야 한다. 50이면 40, 30이면 24, 60이면 48, 이런 식이다. 속도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나는 오디오 볼륨을 확 높였다. 불안한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나의 소리가 더 큰 소리에 묻힌다는 건 분명 신의 축복일 것이다. 어떤 소리가 듣고 싶지 않다면 그보다 더 큰 소리를 만들어내면 그만이니까. 그건 하나의 배우자와 70년을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손님이 없을 것이다. 이런 짙은 안개를 뚫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배짱 두둑한 인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나는 가야 한다. 나는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카페인 중독의 주된 증상은 두통이다. 제때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으면 서서히 줄어드는 죔쇠가 머리에 채워진 것처럼 압박이 심해진다. 압박감은 고무망치로 이마를 툭툭 치는 것처럼 가소롭다가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랠 때처럼 날카로워진다. 평소에는 이런 일이 드물다. 매 순간 커피를 입에 대고 있으니까. 온종일 마실 예정이기에 연하게 타서 천천히 마신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그래야 속앓이가 적다. 라떼는 허기질 때 가끔 마신다. 찬 우유는 가급적 마시지 않는다. 체하기 쉽고 마시고 나면 배가 아플 때가 많다. 카페지기의 장점은 원하는 대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점. 카푸치노처럼 우유 거품으로 절반을 채울 때도 있고 아메리칸 라떼처럼 적당히 거품을 올릴 때도 있다. 시나몬 대신 초코 파우더를 얹어 마실 때도 있다. 


  간혹 카페지기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발목을 잡는 건 카페인 중독이다. 원하는 커피 맛을 얻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집에서는 불가능하다.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으로는 한계가 있다(일단 수율을 맞출 수가 없다). 드립백도 좋은 대안이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안 간다. 


  결국 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는 차라리 맥심 모카골드 커피믹스를 타 먹고 만다. 궁할 때는 맥심만 한 것이 없다. 콜라보 행사 때 쓸만한 사은품이 붙은 300개들이 박스를 사면 과장 좀 보태 1년은 넉넉히 먹는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밥 대신 과자로 살 수 없고 자동차를 몰다가 버스를 타면 없던 멀미도 몰려온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내 영혼의 절반은 카페에 저당 잡혀 있다. 카페인에 중독된 자의 최후는 결국 카페인(人)으로 남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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