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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brosia Sep 05. 2020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펼쳐 보이는  ‘부부의 세계’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주 오래전, 그녀는 서울 변방의 여고 문학부 부장이었고 나는 합창부의 부장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고 우연히 페이스북의 세계에서 마주쳤는데, 프로필을 보자마자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단정한 옆모습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무척 용감하게도 안정적인 직장을 뛰쳐나와 1인 출판사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합창부 부장답게 노래방을 사랑하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녀의 출판사가 며칠 전 출간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보는 순간,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 이름 만으로 충분했다.
자전적 소설이자 영화로도 유명한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양가휘와 제인 마치가 차 뒷좌석에 앉아 침묵 가운데 손가락을 스치는 장면에서 나는 인생의 첫 에로티시즘을 만났다.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관계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무엇보다 선명한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소녀의 표정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있었다.

 과연 이 책에서 뒤라스는 어떤 형태의 사랑을 보여줄지, 이탈리아 포르토피노 해변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turquoise 색상의 표지를 넘기며 기대감이 출렁거렸다.




 “지나치게 가파른 산과 지나치게 바짝 맞닿은 강 때문에 결코 개발될 가능성 없이 철저히 외진” 이탈리아의 한 바닷가 마을.
세상 어디와도 닮지 않은 원시적이고 폐쇄적인 이 마을로 사라와 자크 부부(그들의 어린 아들), 루디와 지나 부부, 독신의 다이아나, 이 다섯 친구가 휴가 여행을 온다.
느즈막이 일어나 수영하고 식사하고 잡담을 나누는 것 외에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휴가지의 나른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한 낯선 남자가 나타난다.
‘태양에 그을린 갈색 피부와 매끈한 몸, 그리고 멋진 보트’를 소유한 그의 등장으로 인해 친구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게 된다.

그리고 그 긴장감이 불러온 사건의 개요는 사실 한 줄로도 요약이 가능할 만큼 단순하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단순한 스토리를 더없이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 독백 그리고 바라보는 시선들 속에 있다.


이틀 전 오전 같은 시각에, 사라가 별장에서 나와 이곳에 왔을 때 그는 그녀의 존재를 벼락이라도 맞은 듯 얼떨떨하게 인식했다.
그녀는 그의 시선 속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뒤로 이틀 동안 같은 시각에, 그들은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눠왔다.
이틀 전과 마찬가지로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서,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캐노피 안은 둘 뿐이었고, 대화 사이에 스미는 침묵은 들판의 정적만큼이나 강렬했다.
p.31

“당신과 잠깐만이라도 무도회에 가고 싶군요.”
그의 시선은 여전히 경기장에 고정돼 있었다.
목소리는 거의 무심하게 들릴 만큼 차분했다.
“안 될 거 없죠.”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정말로 가능한 일인지 알고 싶어요.”
사라는 조금 주저했다. 자크는 경기에 완전히 몰입해서 다이아나가 공을 던지는 걸 주시하고 있었다.
사라는 말했다.
“가능한 일이에요.”
P.142

“몇 해 전부터 난 밤이면 더러 다른 남자를 꿈꿔.”
“알아, 나 역시 다른 여자를 꿈꿔.”
“어찌해야 할까?”
“세상의 어떤 사랑도 사랑을 대신할 순 없어,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거야.”
p.236


“왜 우린 다들 그렇게 악의적인 걸까?”
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디는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래된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악의적을 만드는 건지도 몰라.
위대한 사랑의 황금 감옥 말이야. 사랑보다 우리를 더 옥죄는 감옥은 없지.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까지 악의적인 사람이 돼 버려.”
p.295


 1953년 뒤라스가 바라본 ‘부부의 세계’는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2020년의 나도 뒤쫓기 어려운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몇 차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는 아내,

그리고 그런 아내가 다른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을 때 (다소 갈등하기는 했지만 결국) 아내의 외도를 용인해주는 남편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륜’ 또는 ‘막장 드라마’ 같은 단어로 매도할 수 없는 것은, 뒤라스의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에 담긴 서사가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소 낯설어 보이는 사랑의 형태를 제시한 사라와 자크 부부도,
더 이상 하루도 같이 못 살 것처럼 매일 싸우지만 사실 누구보다 서로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는 루디와 지나도,
지뢰제거를 하다가 폭발 사고로 사망한 아들의 유해를 붙잡고 끝내 사망신고서에 서명하지 못하는 어머니도,
평생 자신의 꿈과 소원을 이해해주거나 동참해주지 않았던 부인을 먼저 보낸 식료품상 아저씨까지도.
결국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엔 휴가가 없어.”
그는 강물을 마주한 채 그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게 사랑이야.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를 끌어안듯, 사랑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p.306


 삶이 ‘아름다움과 구질구질함과 권태’의  조각들을 여기저기 찢어 붙인 모자이크 작품인 것처럼,
사랑 역시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얼기설기 붙여놓은 색종이 조각들에 불과하지만, 멀리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독특한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개인적으로 책장을 덮고 나서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아른거리는 모습은 사라가 아이를 씻기는 장면이었다.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 어딘가 자꾸 어긋나는 남편과의 대화는 곧잘 사소한 말다툼으로 이어지고 그럴 때마다 사라는 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찬 물을 가져와 아이에게 몇 번이고 부어준다.

난 사라가 아이에게 찬 물을 부어주거나 잠든 아이 방의 창문을 열어줄 때마다, 꾹 참고 있던 숨을 그제야 내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차가운 물을 선택해 샤워기를 트는 순간 얼음장 같은 물줄기가 머리를 적시는 그 시원함.

 사실 무더위보다 더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다.
깊이 심호흡을 하고 뜨거운 불덩이를 삼키듯 터져나오려는 말들을 꿀꺽 삼키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대로 질식할 것 같았던 감정들도 함께.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사라가 언제나 발이 땅에 닿는 깊이에서 배영을 하는 모습에서도 난 호흡을 향한 그녀의 갈망을 느꼈다.
숨을 참아가며 깊고 어두컴컴한 심연을 바라보는 대신 파도에 몸을 뉘이고 하늘을 향한 그녀.
오직 하늘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깊이 공감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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