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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brosia Sep 11. 2020

결혼기념일의 기도

Just the way you are

 

 언제부터인가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오늘도 무사히’ 그림을 띄워놓고 제발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그 날이 지나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우리의 17주년 결혼기념일이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지나갔다.


 참 이상하다.

평소엔 큰 문제없이 지내는데 꼭 생일이나 기념일같이, 좋은 레스토랑에 가거나 특별히 분위기를 잡고자 하는 날이면 결국 싸늘한 침묵 속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부지기수다.

아이들 없이 우리 둘만 있으면 이렇게 되는 걸까? 이제는 대화하려고만 치면 싸움이 되는걸까? 아니면 내가 혼자 흥이 넘쳐서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여러 해 반추를 거듭하다 보니, 아예 기념일 며칠 전부터 보리수나무 아래 앉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심신의 평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 부부가 처음부터 그랬을 리 없다. 우리의 로맨스 스토리를 적고자 하면 맘 잡고 따로 포스팅을 하나 써야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다. 드라마로 만들기에도 손색이 없지만 로케이션만 몇 개 국가를 돌아야 하니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려울 듯싶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사랑하지 않느냐?!

그것도 또 아니다. 서로의 눈만 바라보아도 배부르고 행복했던 사랑의 형태에서 이제는 동지애의 비중이 좀 더 커졌다 하지만, 이것도 사랑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친한 동생이 얼마 전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니!
언니가 예전에 “10년을 살았는데도 어쩜 이렇게 서로 이해하기가 힘들까”라고 했을 때, 속으로 ‘언니 부부는 뭔가 큰 문제가 있나 보다. 우리는  안 그런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몇 년 더 살아보니, 그 날의 언니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사실 우리가 그때 뭘로 싸웠는지, 어떤 일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결혼 10주년 즈음이었다.

사람이 10년 정도 같이 살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고 일컫는 이른바  “척! 하면 착!” 하는 그런 단계에 이를 거라고 나는 상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10주년을 앞두고 나는, 관계의 충만함 대신 아득한 서러움만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분명히 한 콩깍지에서 나온 완두콩처럼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음식에 대한 기호도, 영화와 음악에 대한 취향마저도 어쩜 이렇게 잘 맞냐고 놀라던  사이였다. 우리를 가로막는 대륙의 시차가 얼마이든지 너의 외침에 바로 응답할 수 있는 관계라 믿었다. 세상에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이라 믿었던 우리들인데, 어쩌다 때때로 “난 도저히 너 같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비난을 던지는 사이가 되었을까?

18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정확한 이유 또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오늘도 무사히’ 보내기를 바랄 뿐이다.




 거실에서 갑자기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가보니 남편은 여느 때처럼 티브이를 틀어놓고 잠들어버렸고, 어느 자동차 광고에서 친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Don't go changing, to try and please me
날 기쁘게 하려고 변하지 말아 줘요
You never let me down before
당신은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어요
Don't imagine you're too familiar
당신이 너무 친숙해져서
And I don't see you anymore
더 이상 내가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질까 걱정하지 말아요
.
.
I took the good times, I'll take the bad times
좋은 시절을 함께 한 것처럼 힘든 시간도 함께 할 거예요
I'll take you just the way you are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어요


  언제 들어도 항상 가슴 설레는 노래. 바로 롱디스턴스 연애를 하던 당시 그가 전화기에 대고 곧잘 불러주던 노래다.


 “지금 당신의 모습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말아요.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요~”라고 고백했던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  “아! 정말 저것 좀 안 고쳐질까? 왜 이렇게 저 인간은 말귀를 못 알아듣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슬프게도 그렇게  변할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그 변화를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세월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의해 변해버린 우리의 관계가 참 서글프다. 앞뒤 따지지 않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나와 그”가 무척 그립다.


 선풍기가 계속 돌아간다.

나는 17년 전 우리가 나누었던 불꽃의 추억에 힘입어 소파에 쓰러져있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배 아프지 말아요 내 사랑.

다 이해하긴 어려워도 있는 그대로 우리 사랑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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