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의『나귀 가죽』을 읽고
<나귀 가죽>이라는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샤를 페로의 <당나귀 가죽>이라는 동화책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줄거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어느 나라의 공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두 책의 제목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가죽’이라는 소재는 존재만으로도 묘한 신비감과 긴장감을 준다. 책을 한 장씩 읽어가며 느낀 것은 이 책이 당시 프랑스의 시대상에 대해서 면밀히 묘사하고 있는 역사 소설이며,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깊게 인간 본성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심리 소설이라는 점이다. 저자인 오노레 드 발자크,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펜으로 그리는 신랄한 풍자
책의 초반부에서 라파엘은 나귀 가죽에게 빈 첫 번째 소원의 성취를 통해 갑부인 타유페르의 연회에 초대받게 된다.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로 가득 찬 연회장은 금세 소란스런 토론과 언쟁의 장으로 변한다.
“초기 국가에서 권력은 어느 정도 물리적인 수준에 의존한데다 단순하고 변변치 않았지. 그러다가 사회 집단이 늘어나면서 정부는 원시 권력을 어느 정도 요령 있게 분리시키는 방법을 취하기 시작했지. ...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문명의 최종 단계로서 구성 분자의 수에 따라 권력을 분배했어. 그래서 산업이라 불리고, 사상이라고 불리고, 돈이라고 불리고, 연설이라고 불리는 권력들이 나타난 거지. 그러자 이제 더 이상 통일성을 갖지 못한 권력은 끝도 없는 사회적 분열로 치닫고, 각자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다보니 그 분열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사회체제와 기득권층만이 아니다. 그들은 19세기 프랑스의 모든 사상, 종교, 도덕과 윤리, 지적 능력, 철학 등 당시의 지식인들이 누리고 있었을 대부분의 가치를 조롱하며 비난한다. 더욱 모순적인 것은, 이렇게 해학적이고 비판적인 대사를 내뱉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 존재 자체로 당대의 지식인들을 풍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잔을 떨다가 술에 취해 나동그라지는 사람들, 어줍잖은 지식으로 뽐내고 있는 사람들, ‘여전히 자신도 뜻을 모르는 말들을 횡설수설 쏟아내는 사람들’... 이들이 술에 취해 여자를 끼고 흥청망청 놀다가 아침을 맞는 장면은 사람들 사이에 공존하는 이 ‘침묵과 소란’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체제의 모순이나 귀족들의 권력 싸움 따위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소설을 처음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나귀 가죽>은 저자가 당대의 상황과 맥락을 상세히 서술하면서도 이에 대한 톡 쏘는 풍자를 잊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눈에 띈다.
사치와 방탕함, 배고픔과 가난
“사유의 연마, 사상의 탐구, 학문에 대한 관조적 명상은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는 쾌감을 아낌없이 주는데, 그 쾌감이 어떤 것인지는 지적 활동에 속하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지적 활동의 현상들이 우리의 외부 감각기관에는 보이지 않듯이 말이야, 설명할 수 없다네.”
<나귀 가죽>에서는 계속해서 지적인 쾌감과 물리적인 욕망이 대립한다. 골동품 점의 노인은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소유하며 관념적인 욕망을 모두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한편, 라파엘의 친구인 에밀은 지적인 쾌락을 비웃는다. 이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일 뿐 아니라 주인공인 라파엘의 내면의 갈등이기도 하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혹은 가난한 것과 방탕한 것의 이항대립은 라파엘이 페도라 백작 부인을 만나면서 더욱 심화된다. 그는 "방탕이란 하나의 정치적인 삶의 방식"이라며 쾌락을 위해 자신의 삶을 투자할 것을 종용하는 라스티냐크를 만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고, "황금만 있다면 안락을 위해 필요한 감정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페도라와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그는 자기를 성찰하며 방탕함이 무엇인지, 또 가난함이 무엇인지 고뇌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라파엘이 폴린과 그의 어머니를 보며 자신이 생각하던 ‘가난함’에 대한 재정의를 내리는 부분이었다. 아직 페도라를 완전히 잊거나, 폴린을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그리고 결국 ‘귀족이 된’ 폴린과 사랑에 빠졌다는 점에서 여전히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고민하던 것들은 나로 하여금 같은 질문을 던져보게 만들기 충분했다.
가난한 사랑도 사랑인가?
사랑에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치는가?
자본주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한, 언제까지나 물음표로 남을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개의 가치는 별개의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파엘의 고민을 보면서는 오히려 대놓고 ‘부티’를 사랑하는 것이 어느 누구보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납작하지만 입체적인 여성
<나귀 가죽>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등장한다. 접대부인 아퀼리나와 유프라지, 페도라 백작 부인과 폴린. 그들은 모두 라파엘이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거나, 각성하거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며, 저자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그들의 외모를 찬양하거나 헐뜯기도 한다. 2부의 중간부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본성’에 대한 길고 긴 고찰은 여성이 그에게, 또 저자에게 얼마나 타자화된 존재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간이기도 하다.
“스스로 유행의 옷걸이를 자처하는 데데한 여자들은 헌신하는 마음이 없어. 그런 여자들은 헌신을 요구하기만 하고 사랑에서 명령하는 즐거움만 누리려 하지 복종하는 즐거움은 알지 못한다네. 마음속, 살 속, 뼛속까지 진정한 신부란 자신의 인생과 역량과 영광과 행복을 좌우하는 남자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주저 없이 따라가는 법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는 사치스럽거나, 혹은 몰지각한 인물으로 등장하는 여성의 입을 빌려 나오는 여성들의 언어가 존재한다. 유프라지는 ‘정숙하지 않은 여자는 별로’라는 에밀의 말에 ‘정숙함’이라는 단어에 담긴 남성중심적인 의미를 꼬집는다. 증오하는 남자에게라도 한평생 헌신할 것, 자식이 너를 버릴지라도 훌륭하게 자식을 키워내는 법을 배울 것, 그리고 자식이 너의 가슴을 멍들게 해도 그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 유프라지의 신랄한 비판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2020년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피부로 와닿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정숙함이 무엇이길래 국가와 인종을 불문하고 아직까지 누군가의 족쇄가 되어 남아 있는가? 19세기 프랑스에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타자화와 혐오의 씁쓸한 흔적을 느끼며, 200년 전 소설 속에서 그저 ‘어느 불만 많은 접대부의 불평’ 정도로 지나간 대사를 곱씹어본다.
평범하기 때문에 값진 이야기
어찌 됐든 결국 라파엘은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러나 발자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라파엘이 드물게 불행한 사람이었다거나, 보다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를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
또한 이 책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단 욕망과 죽음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흘러가는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힘을 소유하는 것은 힘을 사용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라는 책 말미의 문장처럼, 후에 언제라도 우리가 우리의 힘과 욕망 사이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나귀 가죽>과, 라파엘과, 이 모든 이야기들이 불현듯 생각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