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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율무 Jan 23. 2021

순수하고 곧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나쓰메 소세키의『도련님』을 읽고


 


  다른 고전 소설들에 비해 더욱 기대가 되었던 이유는 내가 일본 근대 소설을 읽어 볼 기회가 많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기회는 많이 있었겠지만, 청소년·대학생 ‘필독’ 마크가 박힌 고전 소설들이 대부분 서구권의 작품인 것은 사실이다. 지리적 근접성이나 대중문화의 친숙성으로 따져볼 때 우리가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일본의 것일 텐데 말이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확실히 『도련님』을 읽으면서는 비교적 쉽게 등장인물과의 심리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며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인공의 성격과 가치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흥미로워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 생애를 주인공에 투영함으로써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다시 한번 책을 꼼꼼히 되짚으며 생각해보았다.     




우리도 도련님이 될 수 있을까?


 한 것은 한 것이고 안 한 것은 안 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고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과 벌은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벌이 있기에 장난도 기분 좋게 칠 수 있다. 장난만 치고 벌은 싫다는 비열한 근성이 대체 어느 나라에 유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주인공은 작품의 도입부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는 입에 발린 말을 싫어하고, 사람들 눈을 속여가며 혼자만 덕을 보는 것을 혐오하며, 거짓말을 죽도록 싫어하는 아이였다. 너무나 올곧고 바르기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당하곤 하는 영웅소설 속 주인공들이 생각났다. 주인공은 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으로 임용된 중학교에 가서도 이와 같은 뚝심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 능구렁이 같은 성격의 교감, ‘빨간 셔츠’를 만나고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나는 단념이 굉장히 빠른 사람”이라며, 자신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은 배짱이 두둑해서가 아니라, 이 학교에서 잘 안 되면 곧바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갈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강단 있는 태도는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을 지적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나빠지는 일을 장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지지 않으면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간혹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을 보면, 도련님이라는 둥 애송이라는 중 트집을 잡아 경멸한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윤리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지 마라, 정직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편이 낫다. 차라리 큰맘 먹고 학교에서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믿지 않는 비법, 또는 사람을 이용하는 술책 등을 가르치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빨간 셔츠가 웃은 것은 나의 단순함 때문일 것이다. 단순함이나 진솔함이 비웃음을 사는 세상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주인공은 그 스스로의 겉과 속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겉모습을 바꾸는 몇몇 선생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 통렬한 비난은 1900년대 초반 일본 사회에 국한되는 내용이 아닐 것이다. 발췌한 대목을 읽으면서는 우리나라의 다양한 권선징악 서사의 영화들이 생각났다. <베테랑>, <검사외전>, <뺑반> ... 다 옮겨 적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작품들이 비슷한 구조를 사용해 메시지를 던진다. ‘선한 것은 결국 승리한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극장에서 나온 후 현실을 깨닫는다. 권선징악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종종 우리는 자신을 위해 ‘악’이 되어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된다.


  현실에서 삶의 부족한 부분을 모두 채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뿐이다. 반면 도련님은 이러한 욕망에서 자유롭다. 부족한 것을 모르기에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싸울 일도 없기 때문이다. “도련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욕심과 욕망의 집, 그 문밖에서 그저 지켜볼 뿐이다. 세상 안에 존재하나 세상 바깥에 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도련님이라는 정체성을 얻게 해준 환경은 과거일 뿐, 도련님은 현실에 산다는 것이고, 인생은 쉬지 않고 흘러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함몰된다는 것이다.” 소설가 백가흠 씨가 쓴 작품해설 중에서 나온 내용이다. 작품 속에서 내내 ‘도련님’의 위치를 고수하는 주인공은 모두에게 객관적이고 비판적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그렇다. 순수한 관조의 자세, 그 사이에 강렬한 감정과 목적의식, 간절함은 끼어들 수 없다. 그에겐 모든 행동이 충동적인 모험일 뿐이다. 그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이것은 주인공이 누구보다 곧은 심성을 가졌지만, 이는 자의적인 선택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위치와 권력 등으로 인한 성품이라는 모순점을 의미하는 것도 같다. 현실적인 삶, 타인과의 관계 속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하는 성격은 모든 이들을 냉철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의 성향을 띄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위선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순수한 만큼 무겁게 다가온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 꼭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 반대로 “끽소리 못하는 사람이 꼭 악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만 조아리고 계속해서 못된 장난을 치던 학생들과 마찬가지일 거라는 것.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비는 것을 가짜로 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도 가짜로 용서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 만약 가해자가 정말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후회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것. 어떻게 보면 뻔할 정도로 원리적이고 또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들이지만, 적어도 주인공은,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는 나를 포함해 현재를 살고있는 독자들에게 도련님으로써의 질문을 던진다. 네가 생각하는 그 필요악은 정말 ‘불가피한 것’이 맞느냐고.     




서로에게 빚지고 살아사는 사회


  『도련님』을 읽으면서 작품 속에 일본의 문화적 특성이 잘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 <국화와 칼>, <일본사 다이제스트> 등 일본을 다룬 책들을 통해서 일본인의 민족성에 대해 공부했던 경험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일본인들의 ‘죽어도 타인에게 피해는 끼치지 않겠다는’ 문화적/심리적 기저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에게 선물과 답례란, 그저 형식적인 교환을 넘어서 목숨과 명예를 걸고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민족성을 바탕으로 특정 집단을 지나치게 일반화해서는 안되지만, 최소한 『도련님』 속에서 이러한 심리적 배경이 잘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답례에 대한 부담감은 타인에 대한 권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으며, 빚을 진 사람의 입장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답례’는 하나의 커다란 짐이 아닌가.


  나는 기요에게 3엔을 빌렸다. 그 3엔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갚지 않았다. 갚을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갚지 않은 것이다. 기요는 조만간 갚겠지 하며 내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보거나 하지 않는다. 나도 곧 갚아야지 하면서 마치 남처럼 의리를 내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면 할수록 기요의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 기요의 아름다운 마음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아진다. 돈을 갚지 않는 것은 기요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기요를 나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주인공은 수학교사인 산미치광이가 자신에게 1전 5리짜리 빙수를 사주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백만 냥보다 귀중한 답례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결하고자 한 것은 둘 사이에 쌓인 ‘선물의 빚’이었다. “내일 가서 1전 5리를 갚아버리면 줄 것도 받을 것도 없게 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싸워보자.” 주인공에게 산미치광이가 자신에게 돈을 쓰도록 허용한 것은 산미치광이로 하여금 자신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자신은 그에게 돈을 빚진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갚음으로써 이러한 관계를 청산하고 끊어버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도련님』에는 두드러지는 (혹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문화적 차이가 등장한다.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세계문학’의 특성을 고려하며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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