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사랑 Nov 19. 2021

생긴 대로 사는 건 참 재밌어

캐나다에 사는 김에 생긴 대로 살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사는 김에'라고 말하는 것은 저의 한국행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8여 년 간의 캐나다 생활을 마무리하고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지금처럼 생긴 대로 살 수 있을까요? 사실 조금 두렵기도 합니다. 제 경험 속의 한국은 다른 사람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입 밖으로 꺼내고, 정해진 트렌드를 쫓지 않으면 금세 촌스러운 사람이 되던 곳이라서요. 8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한국도 많이 변했을까요?


저는 여전히 곱슬머리로 살고 있습니다. 생긴 대로 사는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일까요? 고작 곱슬머리를 생머리처럼 펴지 않았을 뿐인데 자존감 항아리를 그득그득 채워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해주고 있으니까요.


고데기와 미용실을 번갈아가며 머리카락에 시간과 돈과 정성을 바르지 않아도 충분히 예쁠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위로가 되더라고요. 내가 태어났을 때 모습 그대로 아무 문제없다고 증명해주는 것 같아서요. 예전에는 지독한 악성 곱슬을 물려받아 유전자 룰렛에서 꽝에 당첨된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곱슬머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알고 나니 이제는 내 곱슬머리가 평생소원이었던 생머리보다 더 나은 유전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ㅎㅎ


심지어 얼마 전에는 아빠를 닮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직모 유전자 첫째 딸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엄마 곱슬머리가 맘에 들어.

내 생머리는 가끔 너무 지루해.”


곱슬곱슬한 제 머리가 꽤 역동적으로 보였을까요? 생머리가 지루하다는 8살 아이의 말에 제 딸이지만 꼬소했습니다.ㅎㅎ 약간 통쾌하더라고요. 생머리에게 부럽단 소리를 듣다니요! 아무래도 몇 달째 서랍 속에서 나오지 않는 고데기를 귀국 전에는 캐나다 당근 마켓에 팔아야 하나 싶습니다.


저는 키도 평균보다 작습니다. 한 번도 바깥으로 꺼내 본 적 없는 곱슬머리를 내어놓고 나니 작은 키를 드러내는 것은 정말 껌이더군요. 이것 역시 캐나다에 사는 김에 생긴 대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키가 안 컸는데 뭐 어떡하라고. 나 키 작은 거 모르는 사람 있나?'라는 다소 뻔뻔한 마음으로 단신이라 구입을 망설였던 컨버스를 샀습니다. 봄, 여름, 가을 내내 정말 맛있게 신었네요. 네, 깔창도 안 깔고요.ㅎㅎ 이제는 롱스커트도 입고, 롱 패딩도 입습니다.


물론 기분 내고 싶을 때는 힐도 신습니다. 이전과 뭐가 다르냐고요? 다른 점은 내 기분이죠! 신어야 해서 신는 신발이 아니라 내가 기분 좀 내고 싶을 때 신는 신발이 되었으니까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대하는 태도는 하이힐과 운동화의 착용감만큼 천지차이잖아요.


캐나다에서의 마지막 가을이 아쉬워서 남긴 동네 사진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에 살았다면 못 보았을 꼴(?)도 많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 가슴골이나 배꼽은 이제 대화할 때 눈을 바라보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거뭇거뭇한 겨드랑이나 심지어는 긴 털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타인의 겨드랑이도 많이 보았습니다. 어디서나 누구나 레깅스를 입는 탓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적나라한 보디라인과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아무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 불편하더라도 남의 외모에는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인간인데 한국과 캐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렇게 다른 모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요.


한국행이 결정되면서 조금씩 마음을 먹는 중입니다. 한국에 가서도 지금처럼 생긴 대로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요. 아, 겨드랑이 털까지는 타협이 어렵습니다. 그곳은 아직 제가 점령하지 못한 영역이네요.ㅎㅎ 작은 키나 곱슬머리, 보디라인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을 하고 기분도 내면서 지금처럼 재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컨버스를 처음 신었을 때 그 발걸음처럼 가볍고 자유롭게요. 꽉 동여 묶지 않아도 되는 곱슬곱슬 자유분방한 내 머리카락처럼요. 그러려면 내가 지금 얼마나 재미있는지 기억해야 할 것 같아, 남은 기간 더욱 힘껏 생긴 대로 살아봅니다.


[미운 우리 곱슬머리] 매거진에 썼던 글은 동일한 제목의 브런치 북으로 발간했습니다. 브런치  공모전에 응모해 보고 싶었거든요. 브런치  발간 이후로 글을 발행하지 않아  글을 읽어주시는 구독자님들께 안부도 전할  오랜만에 글을 남깁니다.

이제 한국도 날씨가 추워지는  같던데 모두 건강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