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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도 Sep 14. 2020

맛있는 커피는 뭐고 맛없는 커피는 무엇인가

중학생 시절 독서실 휴게소의 찢어진 소파에 앉아 레쓰비를 마시며 나는 인생의 쓴 맛을 안다고 생각했다. (레쓰비 캔은 차가울 때 더 달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어린 내게 커피의 맛을 안다는 것은 어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십 대 후반이 된 지금, 커피는 여전히 십여 년 전과 같은 애매모호한 맛이다. 진짜 어른이 된 지금도, 커피가 없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는 다른 어른들의 넋두리를 들으면 나는 아직 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혼자 커피를 마실 때, 커피의 향이 어떻고 맛이 어떻고..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내 혀가 맛을 느끼고 있는 건지, 비염이 심해져서 코가 막힌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게 맛있는 건가, 맛없는 건가... 아몬드 쿠키나 초콜릿 케이크를 시켜서 같이 먹는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빠와 커피를 마실 때나, 친구들과 커피를 마실 때는 괜찮다. 커피를 맛 본 친구가, '여기 커피 맛있네.'라고 하면 나도 맛있게 커피를 마신다. 아빠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이 커피는 밍밍하고 탄 냄새가 난다.'라고 말하면 나도 도무지 마실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나는 커피 시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기생해왔던 것이다.


그런 나도 커피를 '주체적으로' 즐길 때가 있다. 별생각 없이 한 모금 들이켰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남의 감상을 듣기도 전에 너무 맛있는 커피일 때! 담백한 향이 입과 목과 콧속을 그윽하게 채우고, 쓴맛과 신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거리낌 없이 목을 타고 흘러들어 갈 때! 그리고 처음 이 경험을 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고민하던 모든 커피들은 (적어도 내게) 맛있는 커피가 아니었다는 것을.


맛없는 커피는 무엇이고 맛있는 커피는 무엇인가?

맛없는 커피는 맛있는 이유를 찾게 만드는 커피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하는 커피다.

맛있는 커피는, 마시자마자 음~! 하고 발을 살짝 구르게 하는 커피다.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커피다.

(엄마 말씀으로는, 내가 아기였을 때부터 맛있는 것을 먹으면 다리를 흔들거나 발을 굴렀다고 한다.)


이후 나는, 인생에서 내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선택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될 때 맛있는 커피와 맛없는 커피를 생각한다. 맛있는 커피와 같은 확신을 주는 선택을 하려고 하는 편이다.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남이 좋아서 하는 일인가? 부모님이나 사회를 위해서 한 선택인가? 고민이 거듭될 때마다 커피를 떠올린다. 물론 맛있는 커피가 항상 옳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았다. 선택을 번복하거나 틀렸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 나를 몰라서 내린 결정에 후회하는 일은 없었다. 다시 돌아가, 이것은 맛있는 커피인가, 맛없는 커피인가 되묻는 과정이 반복되었을 뿐이다.


덧붙임-

위가 약하므로 커피를 마시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처방에 따라 요즘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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