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업자득의 결과
명절 직전 어느 날, 팀장은 거래처에서 받은 선물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나를 부르더니 어이없는 말을 꺼냈다. "XX 씨는 집에 아버지 안 계시지? 술 선물 필요 없겠네?" 순간 가슴 깊이 비수가 꽂힌 듯한 말을 듣고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퇴근하자마자 엄마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아버지 안 계신 건 맞는 말이고, 그걸로 퇴사하는 건 아니야"라며 나를 다독이셨다. 결국 나는 다시 묵묵히 출퇴근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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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19일, 아빠는 췌장염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아빠의 나이는 겨우 45세였다. 엄마는 39세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셨고, 동생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몇 년간의 투병 생활로 인해 병원을 오가면서, 이른 나이에 이런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아프시던 그때,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 취업할 수 있는 상업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장례식은 어렴풋한 기억 속에 그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어린 마음에 육개장 라면이 맛있었다는 생각만 남아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부터 나는 자격증 공부에 매진했고, 취업이 목표였기에 오로지 그 목표만 바라보며 달려갔다. 고3 초반에 여러 군데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좌절했을 때, 우연히 유명 외식업체 본사에 취업이 확정되었다.
입사 후 나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무실 여직원으로, 유니폼을 입고도 혼자 밥 먹기 일쑤였다. 상사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집안 배경이나 재산을 중요하게 여겼고, 나는 그저 돈이 없어 일찍 사회로 나온 직원으로 구분되었다. 그들의 편견과 차별 속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만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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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시간이 흘러, 팀장은 나를 다시 불렀다. 아빠가 11남매의 막내였고, 강남의 교회를 다니던 둘째 고모가 팀장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고모는 자수성가한 분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고모와 팀장이 교회에서 만나면서 대화가 시작됐고, 그로 인해 나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된 팀장은 나를 다시 호출했다.
팀장은 이번에도 의도를 숨긴 채 나를 불렀지만, 그 표정은 이전과 달랐다. 이제는 나를 무시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부자인 친고모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후로는 비아냥과 무시가 사라졌고, 그저 주어진 일만 하게 되었다.
팀장은 결국 부정행위로 인해 회사를 떠나게 되었고, 나는 그 후 몇 년 동안 더 일을 이어갔다. 팀장이 퇴사하기 직전, 그는 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고모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작년, 고모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그 팀장을 다시 만났다. 문상객 명단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속이 시원해졌다. 과거에 나를 무시하고 비수를 꽂았던 그에게, 내가 이제는 다른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었다.
그 사람도 그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달았을까? 나에게 사과는 아니더라도 미안한 마음이라도 있었을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누구에게든 떳떳한 사람일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최소한의 마음으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쩌면 그 경험이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작은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