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구읽기 Apr 08. 2024

첫 단편 이야기


  22살 여름방학, 전주에 있는 창작극단이라는 연극극단에서 여름 워크숍을 듣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에는 소극장 극을 창작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고, 영상 작업에는 생각이 닿지 못했었다. 연극영화과 수업을 1년 반 정도 복수전공을 한 상태였고, 겨울워크숍에 이어 여름워크숍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름메이커스’라는 사이트에서 전주에서 찍는 단편영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최진영 감독님의 <노스페이스>라는 영화.

지원하기도 전 공고만 보았는데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고, 메일로 프로필을 보냈을 때 보낸 것만으로도 엄청 기쁘고 떨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소중하고 귀여운 첫 마음이다.) 프로필도 찍은 사진이 없어서, 일상사진과 깔끔한 배경의 사진을 PPT로는 만들어서 지원했었다.

  당시 극단 워크숍은 아침부터 낮까지 매일 하고 있었다. 발성부터 움직임을 연습하고, 대표님이랑 테이블에 앉아서 대본을 같이 읽어보고 얘기도 했다. 극단에 있던 무용전공하셨던 선배배우 언니가 한국무용도 알려주셨었다. 연극 대사도 입 밖으로 뱉어보고, 한 달 반 정도의 기간이 지나 마지막날 무대에서 한 장면을 연기하는 과정이었다. 매일 무언가를 애써서 한다는 감각이 즐겁게 남아있다. 연습하던 여느 날과 같은 하루, 문자로 띠링- 미팅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다는 건, 나에게 참 강렬했던 한 순간이었구나 싶다.



  어느 오후, 전주시내에 있는 창이 크던 한 카페에서 감독님을 뵈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둘 다 조금은 상기되어 대화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첫 단편영화를 찍게 되었다.

그때는 카메라에 어떤 사이즈로 내가 나오는지, 이번 컷 다음에 어떤 컷을 찍어야 되는지 이런 개념이 아예 없었어서, 하라는 대로 했다. 현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세팅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없었다. 그저, 현장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즐거웠던 듯하다.

  굉장히 더운 날, 릉에서 찍었던 날이 있었다. 지금이었으면, 촬영할 때 나와있고 잠시 쉴 때는 들어가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들어오라고 신경 써주셔도 내가 기분이 좋아 그냥 쭉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날 밤에 보니, 종아리가 다 타서 빨갛게 익어버렸다. 집에 가서 감자팩을 갈아 올리고, 알로에겔을 발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배우 스스로가 챙겨야 할 영역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던 첫 작업의 순간.

  촬영을 하면서 계속 나의 기분은 공기 중에 떠있어서, 현장은 흘러 흘러갔던 듯하다. 덜컥거리던 마음 없이 재미있게만 촬영했다. 마지막에 병원에서 소품을 던지는 씬이 있었는데, 그걸 잘해야지 하던 결심의 순간도 기억이 난다. 단편을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도 진짜 오래오래 참여했던 것 같다. 새벽 5-6시까지도.

  22살 여름에 단편을 처음으로 찍고, 3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교로 돌아간 나는 조금 달라져있었다. 계속 연극과 뮤지컬 수업을 들어왔는데, 영화파트 수업들을 더 선택했다. 영화파트 수업을 듣게 되니, 영화과 친구들과 얼굴을 익히게 되고, 영화과 영상작업들도 제안해 주어 조금씩 하게 되었다. 재미를 붙였던 나는, 학기 중임에도 필름메이커스에 주말을 이용해서 찍을 수 있는 단편들에 지원했다. 토일/토일 식의 2주에 걸쳐 4회 차를 찍는 작업들. 그렇게 나의 연기방향이 영화로 흘러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을 선택하는 감독님의 용기에 엄청난 감사를 느낀다. 아무런 경력이 없던 나를 선뜻 믿고, 자신의 소중한 작품에 배우로 선택해 주는 것. 나라면 할 수 있을까? 상상하기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님과의 인연은 이어져, 6년 뒤 <연희동>이라는 단편작업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22살과 30살의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마음에 담고 응원하는 작업인들이 되었다.

  또, 영화작업을 하면서 나는 얼굴로 표현해 내는 세세한 감정표현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극장 연극을 좋아하던 이유도 얼굴에 비치는 배우들의 땀과 표현, 생동감을 자세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연극을 맨 앞줄에서 보는 걸 좋아한다.) 이는 영화에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다. 더 소중하게 쓰이기도 한다. 다만, 워크숍처럼 한 달간 매일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시간이 없음에는 아쉽기도 하다.

  최근 이런 초심의 마음을 많이 잃은 것 같아 슬플 때도 있었다. 다시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마음이기에. 모두가 초심을 잃지 말자고 얘기하는 사회이기도 하니까.

  그러던 중, 김창옥 교수의 강의를 스치듯이 보게 되었는데 큰 인사이트를 주었다. 인생은 3단계라고. 첫 번째가 열정기, 두 번째가 권태기, 세 번째가 성숙기. 열정을 지나 권태를 지나 성숙으로 가지 못하고 우울로 빠지기도 하고, 열정을 지나 권태를 지나 성숙에 가닿기도 한다고. 열정은 영원하지 않다. 매일 즐거운 상태가 오히려 미친 상태이다.

  이를 생각하자 철학과에서도 배운 하나의 진리도 떠올랐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도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말로는 익숙한 이 말들이, 현실로 적용하기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나는 열정, 권태를 지나 성숙으로 다가가는 중이다. 모든 변화는 좋은 것이다.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




영화 <노스페이스>
작가의 이전글 연기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