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D+100, 아이가 3차 성징이다
어쩌면 육아라는 것은 2차 성징 이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 아닐까?
건강한 부부관계가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듯이 아이도 부모를 바꾼다.
신체적으로는 아내뿐만 아니라 나도 아이에 맞춰서 몸이 변한다. 왼쪽 어깨로 안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에 맞춰 내 몸도 왼쪽 인간이 되어가는 사소한(?) 변화부터 손목과 어깨 무릎에서 진행되는 급격한 노화의 느낌까지(정말 급격한 노화다.) 몸은 생각보다 빠르게 아이에게 적응해 간다.
삶의 습관과 행동도 변한다. 수염과 손톱도 지저분해지기 직전 한 번씩 손질하던 것과 달리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훨씬 자주 손 보게 된다. 주말 약속보다는 평일 저녁 약속이 아내를 위해서도 좋았던 아이 이전의 삶과 달리 저녁 시간에 아빠가 해야 하는 역할이 생기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약속은 취소되고 정말 중요한 것은 주말 점심으로 몰리게 된다. 이렇게 아이는 부부 서로에 대한 배려의 개념도 변하게 한다.
부부의 관계도 변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부부는
사랑의 관계가 최우선이다. 그것이 바뀌는
것은 두 사람 간에서도 아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의 웃음은 부모가 함께 웃을 때 가장 이쁘게 피어난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선순위가 아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의 우선순위는 절대적으로 부부 서로에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가족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다. 그렇지만 변하는 것이 있다. 시선과 초점이다. 이전에는 초점은 각기 다르고 한 번씩 상대방의 관심사에 눈을 맞춰주면 행복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이제 부부의 초점은 온전히 아이가 차지한다. 가장 큰 대화의 주제는 아이가 되고 다른 주제로 시작한 이야기도 아이가 우선해서 고려된다. 시선의 변화는 나 스스로도 놀라운데 예전에는 아내는 사랑하는 여자였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여자인 데다가 사랑하는 딸의 엄마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폭이 개인과 개인에서 아이를 포함한 말 그대로 연합적인 성격이 생겨난다.
즉 아이에 관해서 구축한 각자의 고유 영역에 관해서는 서로가 의지하게 되고 터치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그리워하는 엄마의 품은 실제 한다. 아빠가 어떻게 해도 달래지지 않던 아이가 엄마 품에 쏙 안겨들 때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추게 된다. 또 아빠가 하는 힘쓰는 일도 엄마가 하려면 효율적이지 않다. 우리 집은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는 건 엄마가 잘하고 아이를 웃게 하는 건 아빠가 잘한다. 이런 영역의 변화를 내가 아내를 보는 시선은 사랑하는 아내에서 따뜻한 품을 가진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내 또한 내 모습을 보며 이렇게 아이에게 잘할 줄 몰랐는데(?) 라는 새로운 아빠의 모습을 발견한다. 도대체 내가 평소에 어땠길래 저런 표현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선의 변화 속에서 우리 부부는 육아 동지가 되고 뚜렷한 의지의 대상이 된다.
세상이 우리 보고 변하라고 외칠 때는 눈 딱 감고 외면할 수 있었는데, 아기가 우는 울음과 웃음에는 부모를 자발적으로 변하게 하는 3차 성징의 원동력이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