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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햇살 Aug 28. 2023

분갈이

  입추가 지났다. 낮과 밤이 따로 없이 한증막과 같았던 여름날이 지나고 최소한 저녁이나마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더위라는 게 참 이상해서 에어컨이 켜있는 직장에서 일한다고 더위를 모르는 게 아니다. 마치 온몸 구석구석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쫓긴 더운 기운이 머리 꼭대기에 모여있다가 퇴근길 문을 나서자마자 펑! 터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출퇴근만으로도 벅차던 어느 날, 문득 거실의 화분들을 보니 물이 부족해 돌 돌 말린 잎이 보였다. 나름 애틋하게 가꾸던 고사리존의 몇몇 고사리 줄기는 이미 말라서 바스러질 정도였다.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이고~ 미쳤어. 미쳤어~’ 하며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가관이었다. 말라서 떨어진 잎들, 마른 줄기, 바람과 물이 부족했으니 병충해까지 생겼다. 그 와중에도 기특하게 자란 아이들은 화분이 작아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 이거 필요한 공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당장은 급한 불을 끄고 대대적인 공사를 준비해야 했다.      

  식물과 함께한 이후로는 식물들의 상태가 나의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마음이 바쁠 땐 어쩜 그렇게 까맣게 잊는지… 거실 창가 가득하고도 안방, 주방 곳곳을 차지한 초록 잎이 누렇게 바래가도 하나도 안 보인다. 긴장되고 조바심이 날 때면 억지로 관심을 돌리려 식물을 돌볼 때도 있는데 그럴때면 안 떨던 유난을 떠느라 영양제도 잔뜩 뿌리고 과습이 올 정도로 물을 주곤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집 식물들이 가장 반짝이고 싱그러울 때는 내가 아주 균형이 잘 잡힌 삶을 살고 있을 때 이다. 엄마로서, 큰 딸로서, 직장인으로서나 학생으로서도.  마치 다섯 개의 공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는 광대처럼 고르게 관심과 애정을 분산하는 하는 일에 멋지게 성공하는 시기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기는 일 년에 2~3주 정도?  그 외의 기간들은… 뭐 가끔 이렇게 대공사가 필요할 때가 있다고만 해두자.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 일부러 늦잠까지 자두었다.  이 정도의 큰 공사는 일단 시작하면 다섯 시간은 꼼짝도 못한다. 분갈이 용으로 쓰는 김장 깔개와 흙 포대, 화분 흙을 쏟아두거나 섞을 때 쓰는 큰 김치통까지 나왔다. 병충해 방지를 위해 흙에 섞을 친환경 제재와 배수층을 만들 마사토, 흙삽, 덩어리진 뿌리와 흙을 긁어낼때 쓰는 작은 갈고리, 흙을 털어내는 붓, 화분바닥에 까는 깔망까지 온갖 살림이 다 나왔다. 일단 죽은 화분들부터 꺼내왔다. 그 다음으로는 잘 자라서 좀 더 큰 화분이 필요한 아이들, 마지막으로 마른 잎과 줄기를 손봐주어야 할 아이들까지.. 이렇게 다 꺼내고 보니 오히려 남아있는 화분들이 더 적을 정도다. 화분들이 있던 자리에 떨어진 잎과 넘친 흙들을 쓸어내고 청소를 먼저한다. 그래야 새로 심은 화분들을 바로바로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예뻐서 올 해에만 두 번째 심었지만 기어이 떠나보낸 황금 조팝과 비덴스, 그리고 한 철 잘 보았던 한련화 였던 마른 풀을 걷어내고 흙을 쏟았다. 예쁘게 살아 있던 아이들을 데려와서는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하고 이렇게 말려죽였으니 미안하고 속상하다. 황금 조팝은 내가 물을 주는 주기보다는 더 자주 줘야 할 것 같아서 너무 예쁘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화분을 여럿 죽이다 보면 이 식물이 어떤 점 때문에 우리 집과 맞지 않았는지 알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후의 식물 선택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쏟은 마른 흙을 분갈이 흙과 섞고 병충해 방지를 위해 친환경 제재도 약간 섞어 주었다. 식물이 많아지면 병충해가 왔을때 여러 화분으로 쉽게 번지기 때문에 평소에도 관리를 잘 해주어야 한다. 기존의 화분이 비좁아진 아이들은 적당한 크기의 새 화분과 짝지어 놓았다. 식물의 높이와 색깔, 늘어지는 정도와 화분의 크기와 색 등을 고려해서 고민하는 이 시간이 내게는 마치 새 옷을 사는 일처럼 설레고 즐겁다. 예전엔 그저 식물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했는데 이렇게 분갈이를 여러번 해오며 사람도 옷이 날개인 것처럼 식물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나아가서는 모든 일이 그렇다는 것도 말이다. 화분이 빡빡하도록 힘들게 자라온 아이들이 기특하다. 새 화분으로 옮기기 전에 얼크러진 뿌리를 가볍게 풀어주었다. 뿌리 속으로 흙이 너무 굳어있다면 살짝 부숴서 훑어준다. 무리하게 뭉쳐있는 뿌리들은 과감히 잘라낸다. 그래야 새 화분에서 새 흙으로 더 쉽게 뿌리를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을 새 화분에 담아 가장 예쁜 각도를 찾는다. 이 작업을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얼굴을 찾는다고 하셨었다. 꽃이, 식물이 가장 예쁜 자리를 찾아서 그 자리가 돋보이는 방향으로 심어주는 것이다. 새 흙을 채워준다. 화분을 두드리거나 식물을 살짝 들었다놨다하면 미처 채워지지 못한 곳까지 흙이 채워진다. 그렇다고 너무 흙을 꽉 눌러 담으면 식물이 새 흙사이로 뿌리를 뻗기 힘드니 자연스럽게 채운다는 느낌으로 흙을 담는다. 어차피 물을 주면 또 푸욱 꺼지고 그러면 흙을 좀 더 채워야 한다. 이렇게 9개의 식물이 새 자리를 찾았다. 어려서 5천원, 7천원 정도 모종 수준에서 데려왔던 아이들이나 한 줄기 얻어와서 물꽂이를 하고 뿌리를 내어 심은 아이들에게 이렇게 새로 큰 옷을 입힐 때는 무척이나 뿌듯하다. 분갈이를 마친 화분들에 물을 충분히 주고 흙을 좀 더 채워넣고 이름표를 바로 꽂은 뒤 새 자리를 찾아 놓아주었다. 누런 잎은 떼어내고 마른 줄기는 잘라주었다. 단정해진 모습에 마음이 흡족해진다. 작은 화분의 식물들이 좀 큰 화분으로 옮겨가 빈화분이 많이 생긴 것도 이 흡족한 마음에 일조했다. 뿌듯한 마음에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허리로 전엔 흙만 털어 쌓아두었던 빈 화분을 솔로 빡빡 닦아 피라미드 모양으로 엎어두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고 하고 싶지만 너무 오래 걸린 탓에 뱃가죽이 늘어붙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불렀다. 가슴도 부풀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집의 식물들은 나의 상태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내 마음이 바쁘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면 우리 집 식물들은 그런 나를 그대로 비추어 준다. 하지만 오늘, 나는 그런 관계를 뒤집어 보았다. 이렇게 기특하고 이렇게 싱그럽고 이렇게 푸르른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나도 그런 사람이 아닐리없다. 다시 새로 푸른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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