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식마가 식집사로 변신하게 된 소소한 이야
이 층짜리 멋진 전원주택. 그리고 파아란 잔디와 정원석 사이에 핀 갖가지 야생화, 소나무 아래 키작은 꽃들과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가는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 새들이 먹을까 양파망을 씌워놓은 잘 익은 블루베리, 화려하게 늘어진 공작단풍. 누구나 그려보는 이 아름다운 정경은 나의 시댁이다. 그렇게 무엇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이 집에서 나는 남 보기에 아름다운 집을 부러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 집에 어떤 삶이 담겨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뭘 해도 지청구를 듣는 것이 일상이던 시집살이에서 애증하던 일이 하나 있다면 바로 마당의 식물을 가꾸는 일이었다. 여름 날 아침 잠에 취해 자고 있노라면 창 밖으로 돌 틈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일어나신 시어머니가 마당 한 켠 보도블록 사이에 난 풀을 뽑고 미처 뽑을 때를 놓친 굵어진 풀을 과도로 끊어내는 소리였다. 그럴 때면 나는 눈곱을 뗄 틈도 없어 뛰쳐나가 같이 풀을 뽑곤 했다. 쪼그려 않아서 등에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미처 다 떼어놓지 못한 잠을 떨쳐 내었다.
결혼하기 전의 나는 식물엔 도통 관심이 없었다. 핑계를 대자면 식물과 서울의 월급쟁이 생활은 삶의 속도 차이가 너무 컸다. 한 시간 반이 걸리는 통근시간을 인파에 떠밀려 왕복하고나면.... 참 신기하기도 하지. 분명 하루의 1/3은 일을 했고 또 1/3은 잠을 잤을텐데 왜 오히려 나를 위한 시간이었을 1/3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걸까. 여하튼 그런 시간들 속에서 식물이란 가끔 부려보고 싶지만 결국은 죄책감만 남길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꽃바구니에 들어있든 화분에 들어있든 그저 언젠가는 볼품없이 말라 쓰레기가 될, 더군다나 빈 화분 버리지도 못하고 남아 눈에 걸릴 때마다 마음에도 걸릴 그런 죄책감 말이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들어와 살때다. 시어머니는 식물계의 금손이었다. 집안에도 화분이 제법 있었는데 마침 이사를 하시면서 본인 마음에 흡족한 작은 마당까지 생겼으니 얼마나 일이 많았는지. 풀이 한창 자라는 초 여름부터는 이른 아침 시어머니가 마당으로 나서는 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서 허둥지둥 뒤따라 나서고는 쪼그려 앉은 등으로 뜨끈해지는 해를 받으며 풀을 뽑곤 했다. 어린 것은 쉬이 뽑히고 어느 틈에 굵어진 것은 칼 끝으로 끊어내며 풀을 매노라면 내가 끊어내고 있는 것이 풀인지 꼬리를 길게 늘여 따라온 아침 잠인지 얼멍하였다.
매년 봄이 오면 어머님은 차를 끌고 동네에서 가장 큰 화원으로 갔다. 팬지와 페츄니아, 갖가지 색의 꽃이 피는 채송화는 지정석까지 있는 아이들이다. 그 외에도 무스카리, 시계초, 클레마티스 같은 꽃까지 한 이십 만원 어치를 사와서는 마당에 늘어놓고 이리저리 가늠하셨다. 처음엔 배운 대로 포트분을 살짝 찌그려 화초를 꺼내어 건네드리거나 가장자리 흙을 채우고 물을 받아오던 조수만 했다. 그저 쫓아다니며 뭐를 심는지 마는지도 모르고 잔심부름만 해도 아침나절이 훌쩍 지났다. 여름내 꽃을 보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걷어내 버리는 몇 몇 한해 살이 꽃들과 여름을 나는 동안 세네번은 깎아주어야 하는 마당의 잔디, 뽑아내고 베어내도 등 뒤로 자라는 듯한 풀들 어머님의 자랑인 그 마당은 내게는 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두 해를 보내고 난 뒤의 일이다. 작년 봄 소나무 아래 심었던 무스카리가 겨울을 나고 새로 난 것이다. 봄이 되어 어머님과 마당을 새로 정리하며 소나무 아래 마른 솔잎들을 걷어냈는데 그 아래로 비죽비죽 부추잎같은게 났다. 잡초인가하고 뽑아내려고 보았더니 알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제야 아, 작년에 심었던 걔구나 하고 내버려두었더니 어느새 보라색 꽃을 피웠다. 지금 생각하면 희안한 일이다. 새로 꽃이 피고 지고 심고 자라고를 매년 보았으면서 새삼 내 가슴속에 들어온다는 것이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나오면 첫 눈길을 주었다. 그랬더니 매일이 달랐다. 새로 나고 있는 잎이 보였고 새로 올리는 봉오리가 보였다.
내가 식물을 키우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나와 다른 시간을 산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봐야 똑같은데 뭘.. 실제로도 그렇지 않나. 한해살이 풀도 있고 나무들은 수 백년을 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식물들도 나와 같이 하루를 산다. 하루 낮과 하룻 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만큼 자란다. 매일 그 모습 같아도 매일 다르다. 새 순 하나라도 오르고 있고 미쳐 눈이 닿지 않은 곳에서 혼자 꽃봉오리를 만들어 밀어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자꾸 보다보니 나도 믿게 된다. 저 아이들처럼 나도 어딘가 자라고 있을거라고. 미처 보지 못한 곳에서도 우린 성장하고 있다고.
그 뒤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다. 늦잠을 자서 슬리퍼도 반만 신고 뛰쳐나오는 아침은 여전했지만 더 고운 눈으로 식물들을 볼 수 있었다. 어머, 너 또 컸구나! 하고 반갑게 맞아줄 수 있었다. 같은 시간을 사는 친구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