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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Apr 06. 2023

섣부른 '힐링' 없는 성장소설

'고고의 구멍', 현호정, 동아시아 서포터즈 서평

<고고의 구멍>, 현호정, 허블(2023).

지난 식목일, 반가운 소식이 두 개 도착했다. 하나는 지난한 산불을 끝낼 봄비였고 다른 하나는 문학동네에서 매년 펴내는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출간이었다. 현호정 작가는 올해 처음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고고의 구멍》은 현호정 작가의 이름이나 그가 그려내는 세계가 낯선 이들에게 추천할만 한 책이다.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지만, 작가가 직접 "내가 기억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전부터 구상한 이야기(202)"라고 표현할 만큼 작가 특유의 환상적인 세계관과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이 어우러진다.


책은 주인공 '고고'의 여정을 묘사한다. 고고의 여정은 신나는 모험담도, 숭고한 영웅담도 아니다. 이야기는 고고가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쌍둥이로 태어난다. 고고처럼 혼자 태어난 '홀로둥이'는 불행과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고고는 자신과 똑같은 홀로둥이인 '노노'와 함께 생활했지만, 노노가 병으로 죽은 이후 결국 마을에서 추방당한다. 그 후 삼 년 간 습지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던 고고는 어느날 자신의 가슴에서 검은 구멍을 발견한다. 뻥 뚫린 구멍 속으로는 바람이나 물건이 드나들뿐더러, 고고가 먹고 마시는 것들이 구멍을 통해 줄줄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고고는 가슴의 구멍을 메울 방법을 찾기 위해 '협곡인'들을 찾아간다.


일반적인 성장서사나 모험담의 구조를 따르자면, 이 이야기는 고고의 가슴의 구멍이 완전히 아무는 것으로 맺어져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풋풋한 사랑이나 찬란한 우정 이야기까지도 담아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이 책을 향한 구병모 작가의 추천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아물어야 하는 상처인줄로만 알아서......" 즉, 고고의 구멍은 아물어야 하는 상처나 메워져야 하는 결핍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고의 구멍은 홀로둥이로 태어난 선천적인 결핍 때문일까, 고고의 마음의 상처 때문일까, 노노의 죽음 때문일까, 아니면 세계의 비밀 때문일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든,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고고의 구멍은 씻은 듯이 없어져야 할 흠이 아니며 다음 단계로 발돋움하기 위한 발판도 아니라는 것. 구멍을 섣불리 지워내거나 바느질하는 대신에 마음 속에 구멍을 품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현호정 작가의 《고고의 구멍》은 독보적인 위치에 자리매김한다.


고고의 구멍에는 많은 것이 담기고 또 빠져나간다. 고고가 생존을 위해 먹고 삼켜야하는 음식물들은 구멍을 통해 고통스럽게 흘러나온다. 소인小人 '금'이 고고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고고는 안정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금의 감정에 지나치게 동화되며 혼란스러워한다. 구멍 속에 바람이 들락거리며 몸이 붕 뜨는 것에 고고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동시에 바람을 이용해 먼 거리를 쉽게 이동하기도 한다. 고고는 구멍 때문에 괴로워하고 불편해하면서도 결국 구멍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하나둘 배우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존재가 고통이 남긴 흉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새살이 돋은 곳에는 감각이 없는 법이고, 그래서 새살은 자신과 세상에 아무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그가 이제는 어느 정도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됐다고 넘겨짚는다면 그것은 무신경한 일이다. 지옥에 익숙해지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모르고 한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디킨슨에 따르면 그것은 눈밭 위에서 죽어가는 일과 비슷한다. "냉기"를 느끼다가, "혼미"를 경험하고, 마침내 "방기"해버리는 것 이러고도 살 수 있는가? 그랬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내가 한 사람의 심장을 부서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내 삶은 헛된 것이 아니리." 이렇게 말해놓고 왜 자기의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았을까. (《인생의 역사》, 신형철, 문학동네(2022), 51-52쪽.)


"그 어떤 상처도 스스로 아물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었지. .....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어떤 상처도 남의 도움으로만 아물지는 않거든. 모든 상처는 안팎으로 아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아무는 거야."
(《고고의 구멍》, 현호정, 허블(2023), 84쪽.)



고고는 노노의 죽음으로 냉기를 느끼다가, 혼미를 경험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방기해버린다. 그러나 고고가 디킨스와 달리 가슴에 구멍이 나고서도 심장이 부서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던 건 누군가의 도움 때문이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도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호정은 그 어떤 상처도 손쉽게 치유될 수 없으며, 온전히 제 힘만으로 회복하거나 타인의 온정에만 기대어 극복할 수도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상처를 아물게하고 가슴의 구멍을 채우는 과정은 때때로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또 상처는 결코 하루아침에 낫지 않지 않기 때문에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 또한 배워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상처는 귓불에 난 구멍과도 같아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완전히 메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호정 작가는 상처와 성장의 이러한 진리를 《고고의 구멍》이라는 낯선 행성 속에 아름답게 담아낸다.


소설은 하늘을 나는 고고의 뒷모습을 묘사하며 끝이 난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고고의 비행을 상상하다보면, 앞서가는 고고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고고의 구멍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아문다면, 어쩌면 그 누군가에는 《고고의 구멍》을 읽는 독자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고 또한 독자의 구멍이 아무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내 상처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 때, 다른 사람의 아픔은 순식간에 낫는 것 같은데 유독 내 상처만 지지부진하게 낫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밤에 고고의 구멍을 떠올리고 싶다. 고고의 구멍은 아직도 남아있을지 완전하게 아물었을지 궁금해하면서. 고고의 구멍이 아직 남아있다고 해도 고고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 같으니, 어쩌면 나의 구멍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하고 조금 기대하고 크게 한시름 놓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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