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골목, 과자 봉지 소리와 외상 장부
학교 끝나는 시간이었다. 골목 어귀 구멍가게 앞에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복 입은 중학생 둘, 체육복 차림의 초등학생 셋. 그들은 가게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종이 딸랑 울렸다.
가게는 생각보다 좁았다. 입구에서 계산대까지 서너 걸음이면 닿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 온갖 것들이 빼곡했다. 과자, 음료수, 라면, 아이스크림. 천장까지 닿은 선반엔 이름도 모를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모든 것이 낡았지만 정겹게 보였다.
계산대 뒤에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손에는 볼펜을 쥐고 계셨다. 뭔가를 적고 계셨다. 아이들이 들어와도 고개만 들었다 내리셨다. "천천히 봐" 하시는 목소리. 아이들은 과자 진열대 앞으로 몰려갔다.
새우깡, 포카칩, 쫄병, 쪼리퐁. 오래된 과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떤 건 포장지가 바래 있었고, 어떤 건 먼지가 살짝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저마다 손을 뻗어 과자를 집었다. 비닐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가 가게를 채웠다.
한 아이가 계산대로 왔다. "할머니, 이거요." 새우깡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는 안경 너머로 가격을 확인하시고는 말씀하셨다. "천 원." 아이는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몇 개가 나왔다. 할머니는 그걸 받아 서랍에 넣으셨다. 쨍그랑,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나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진열대마다 손으로 쓴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500원', '1000원', '1500원'. 어떤 건 테이프가 벗겨져 구겨진 채 붙어 있었다. 가격은 오래전에 적힌 것 같았지만, 아직도 유효했다.
구석 냉장고엔 음료수들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 바나나우유, 초코우유, 식혜.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오래된 브랜드들이었다. 나는 바나나우유 하나를 꺼냈다. 손에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계산대로 가며 생각했다. 이 음료수를 마지막으로 마신 게 언제였더라.
"이것만 주세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가격을 말씀하셨다. "천오백 원." 나는 돈을 건넸다. 할머니는 영수증 없이 거스름돈만 건네주셨다. 카드 단말기도, POS기도 없었다. 그냥 계산기와 서랍만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아이 하나가 계산대 앞에서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동전 몇 개가 손바닥 위에 놓였다. 아이는 그걸 세어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얼마 모자라?" 할머니가 먼저 물으셨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백 원이요." 할머니는 한숨도 쉬지 않으셨다. 그냥 서랍 밑에서 낡은 공책을 꺼내셨다. 외상 장부였다.
"이름이 뭐야?" "김민준이요." 할머니는 페이지를 넘기시더니 이름 밑에 날짜와 금액을 적으셨다. '새우깡 200원'. 그리고 아이가 쥐고 있던 동전을 받으시며 말씀하셨다. "이번 주 안에 가져오면 돼. 천천히."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과자를 들고 나갔다. 할머니는 공책을 다시 서랍에 넣으며 중얼거리셨다. "그래도 다 갚더라고."
나는 그 장면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외상. 요즘 세상에 외상이라니. 편의점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구멍가게에선 가능했다. 할머니는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그들이 갚을 거라 믿으셨다. 그리고 아이들도, 할머니를 속이지 않았다.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초등학생 여자아이 둘이었다. 그들은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너 뭐 먹을래?" "나는 메로나."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꺼냈다. 계산을 하고 나가면서 한 아이가 말했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할머니는 손을 흔드셨다. "그래, 조심히 가." 그 목소리가 따뜻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다시 장부를 펴시고 뭔가를 적기 시작하셨다. 하루의 매출을 정리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숫자를 더하고, 지우고, 다시 쓰시는 모습.
밖에선 아이들이 과자 봉지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들은 가게 앞 벤치에 앉아 과자를 나눠 먹고 있었다. 방과 후의 평범한 풍경. 하지만 그 풍경 속엔, 이 구멍가게가 있었다. 할머니가 있었고, 외상 장부가 있었고, 손으로 쓴 가격표들이 있었다.
나는 음료수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가 여전히 계산대에 앉아 계셨다. 가게 안은 형광등 불빛으로 환했고, 과자 진열대는 여전히 빼곡했다. 그 모습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도, 모레도, 이 자리에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가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편의점이 생기고,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간다는 것을. 24시간, 깨끗한 매장, 카드 결제. 그게 더 편하니까. 하지만 편의점엔 없는 게 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 외상 장부, 손으로 쓴 가격표. 그리고 동네 아이들을 기억해주는 따뜻함.
골목을 걸으며 바나나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어릴 적 맛이 났다. 학교 끝나고 구멍가게에 들러, 친구들과 과자를 사 먹던 시간. 그때는 몰랐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다시 가게 앞을 지날 때, 할머니가 문을 닫고 계셨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 몇 시에 닫으세요?" 할머니는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여덟 시쯤. 그때까지 있어야 학원 끝난 애들이 들르거든."
학원 끝난 애들을 기다리는 구멍가게.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할머니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기다리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외상을 받아주고, "조심히 가" 하고 배웅하는 일. 그게 할머니가 하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구멍가게는 단지 가게가 아니라는 것을. 그건 동네의 기억이고, 아이들의 추억이고, 누군가를 기다려주는 공간이라는 것. 편의점이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
빈 바나나우유 병을 들고 걸으며, 다짐했다. 다음엔 좀 더 자주 들러야겠다고. 필요한 게 없어도, 그냥 들러야겠다고. 할머니가 계신 동안, 저 가게가 있는 동안. 그리고 가능하다면, 뭔가를 사야겠다고. 외상 장부에 이름이 남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돈을 내고 말이다.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구멍가게 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할머니는 여전히 그곳에 계실 것이다. 학원 끝난 아이들을 기다리며. 그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