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은 것도 있잖아
상대방을 인정하는 연습
남동생과 함께 엄마의 납골당을 다녀오는 길에, 냉면 한 그릇을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의 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전했다. 할까 말까 고민되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아빠 집에 반찬 가끔씩이라도 좀 사다 드리지......”
“처음엔 좀 했는데 이제 안 한다. 뭐하러 사 왔냐고 하니까 듣기 싫더라. 아버지 집에서 식사 도 잘 안 하시는 것 같고.”
맞벌이를 하는 동생네 부부는 친정집과 도보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다. 소름 끼치게 착했던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시댁의 반찬과 살림의 이것저것을 보살피는 포지션을 자처했던 나로서는 동생네 부부의 무심함이 종종 아쉽다. 솔직히는 너무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 아빠 입장에서 본전 생각이 나겠다 싶다.
“나는 내가 먹고 싶을 때 걱정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와이프가 돈을 버는 것은 우리 집 가정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아버지 집에 반찬을 해주고 챙겨주는 것은 우리 집에는 별 이득이 없기에 서운하거나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렇다고 친정에 살뜰하게 챙기는 것도 아니니 솔직히 더 그렇고. 나는 경제적 안정이 되어야 다른 여유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나중은 또 몰라도 지금은 내 주머니에 돈이 더 중요하다.”
“그래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잖아. 아빠 나이도 있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와 반대인 누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말이다.”
동생의 당당하고 간단한 정리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문장에 나는 늘 말문이 막힌다. 논리적인 반박을 할 수도 없지만, 상대를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어설픈 고상하고픈 욕구 탓인지 모르겠다. 말주변이 없는 탓일 수도, 여기서 더하면 껄끄러워질 그와의 관계를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편의 효심과 나의 기질이 합쳐서 양쪽 집에 내 능력 이상의 것을 하며 살았다. 그래서 중년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사는 지도 모른다. 가진 것 이상의 어쩌면 허례허식으로 경제적, 심리적 모두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결과가 좋지 않은 탓에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며느리의 역할이 과했던 나의 트라우마로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준다. 그렇다고 동생의 기준치에 동의되지도 않는다. 친정 시댁의 역할 구분이 아니라 어른(부모)에 대한 자식의 역할(동생의 사위 역할도 아쉽긴 마찬가지다)을 말하는 것이다. 아빠의 도움으로 나에 비하면 충분히 살만한 동생에게 받은 것도 많은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냐 하는 노골적인 말을 뱉어낼 재주도 없다. 극단적으로 양 끝에서 살고 있는 나와 동생의 적당한 지점은 어려운 것일까. ‘적당히’가 살면서 제일 어렵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렇게 펴주면서 산 인생의 결과치가 성공적이었다면 달랐을까. 내가 좀 더 그럴듯한 모습의 어른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오늘도 나는 새삼 상대방을 인정하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말을 삼킨다.
“그래도 서로 챙기면서 사는 게 좋은 거잖아.” / “뭐가 좋은데?”
“음...... 그냥 마음이 좋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