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좋은 마음은 무조건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신선한 내용이었다. ‘선한 마음’이 사람과 주변을 ‘이롭게’ 한다는 고지식한 이 전제를 나는 왜 당연하게, 한 번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까.
‘선한 마음’을 품고 실천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대상 역시 복잡 다양한 사람이다. 방법과 정도, 태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이롭다’는 하나로 누구나 같은 크기로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모양이다. 융통성이 없고 맹목적인 생각이었다.
나의 선함이 때때로 상대를 망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상대는 자신이 받는 대우가 나의 의도가 아닌, ‘본인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고마움보다는 ‘당연함’으로 여긴다. 어떤 이들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어 버린다.
나의 ‘선한 마음’의 실현은 그들보다 내가 약자라서 행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당황스러움을 돕고 싶었고, 안도하고-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서였다. 어쩌면 내가 그들보다는 좀 더 여유롭다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류센터에서 알바를 할 때였다. 그곳에는 매일 1/3 정도의 새로운 사람이 온다. 낯선 장소와 일에서 어쩔 수 없는 어색함과 난감함이 느껴진다. 넓은 규모 탓에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할 수가 없다. 뭘 해야 할지 모르고, 필요한 도구를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몰라서 동동거리기도 한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황스럽지만, 일을 찾아서 하는 능숙함은 아직 없다. 나 역시 처음이 그랬다. ‘친절’이라 부르기 민망하지만, 가능한 도와주려고 한다. 그녀의 처음에도 나는 그렇게 했다.
며칠 전,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진 그녀와 같은 part에서 만났다. 그런데 반응이 의외였다. ‘혼자 하면 될 것 같아요’ 나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후에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의하면, 그 일이 마음이 들어서 ‘혼자 하면서 시간을 길게 때우고 싶었던 것’이란다. 반대로 내가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면 그녀는 “이거 같이 해도 돼요?”라고 묻는다.
그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을 나쁘게 생각하는 내 마음을 부끄러워한다. 상대의 의도와 속내를 잘 알지 못하면서 짐작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의 부족함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제 그녀의 행동을 “얌체짓”으로 규정짓기로 했다. 굉장히 세련된 모습으로 결국은 자신의 이익만을 취한다. 필요한 온갖 정보와 편의는 나를 통해 다 얻지만, 굳이 내게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이런 얌체짓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보다 더 잘 살 거라는 확신이 드는 것에 씁쓸하긴 하다. 그녀의 세상살이가 결과적으론 더 현명하고 합리적일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전혀 소통을 하지 않고 단순 반복 작업만 하는 장애가 있는 청년이 있다. 처음과 달리, 이제는 내가 힘들어 보이면 무심하게 무거운 상자를 올려주고 다시 제자리로 간다. 나의 고맙다는 인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매번 감사함을 표한다. 이십 대 초반의 어떤 이는 몇 번의 내 도움이 고마웠다며 오전에 제빵 학원에서 만들었다는 식빵을 건넸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서 일하는 것이 어렵다는 그녀는 첫날의 내 도움을 기억한다고 했다.
내 선함이 그대로 전달되기도,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이 살고 그들은 사는 방식은 더 복잡해서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