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제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출근을 못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요. 어제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더라. 손님도 많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말고 며칠 쉬어요. 병원에도 꼭 가보고”
식당의 주방장으로 근무하는 장 씨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코로나 일지도 모르니, 좀 쉬면서 병원에 가볼 것도 당부했다. 며칠 후, 그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길에서 쓰러진 그가 응급실로 갔을 때 이미 위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단다. 소화가 잘 안 된다며 힘들어 하긴 했지만, 워낙 술을 달고 사는 지라 그러려니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죽는 순간에 자신이 위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년의 그는 혼자 살았다.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친정 엄마의 항암치료를 받을 때 진료실 밖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였다. 말기 암환자들은 담당 교수의 일정이나 치료과정의 변수 때문에 가끔 휴일에도 상담을 한다. 대형병원의 넓은 대기실의 불은 꺼져 있고, 진료실 내부만 환한 탓에 그 불빛을 향해 모든 감각이 향한다. 앞에 들어간 보호자는 형님과 15년을 연락이 끊겼던 사이란다.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을 하고, 혼자 떠돌던 형님의 소식을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로 들을 수 있었다. 폐암 말기. 항암 치료 중에 제일 마지막 단계인 아직은 상용되지 않은 임상실험 진행 중인 약을 쓰는 것이다. 한 번에 몇 백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탓에 결정이 쉽지 않다. 동생은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다면, 본인의 형편도 그리 좋지 않음을 전한다. 형을 외면할 수도 그렇다고 감당할 자신도 없는 당황하는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불편한 형의 마음도 짐작해보았다.
그들의 인생 전부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설레던 기억도, 내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노년이 어쩌면 쓸쓸하고, 누군가에게 애달픈 모습일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삶은 반드시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지는 건 아니다. 나 때문에, 혹은 타인 때문에 힘들고, 힘들어지기도 한다.
삶의 길은 그 끝이 너무 멀어 지금 여기서는 까치발로 서 목을 빼고 내다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 명확한 목적지를 갖고 걷기도,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삶을 살아간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산다는 것을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별다른 의욕과 목적 없이 그저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다가 오늘 같은 가끔은, 내 길 끝이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