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너도 행복하다면
“꽉! 나비다! 나비야! 꽈악!”
가장 목청이 큰 오리가 소리치면 우리는 허겁지겁 개천을 건너 최대한 반대편으로 도망친다. 나비가 물을 싫어하는 것이 참 다행이지. 언제나 도망치는 신세지만, 도망칠 곳이라도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는 함께하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나비의 번뜩이는 눈이 서늘한 밤공기 사이로 살짝 비쳤다. 우리가 물가 너머로 도망친 것을 알고 사람 사는 둥지가 모여 있는 개천 밖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우리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비는 대놓고 꼬리를 치켜들며 사뿐사뿐 풀숲을 빠져나갔다.
부모님의 이야기와 부모님께서 전해주신 부모님의 부모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확실히 몇 세대 동안 오리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언젠가 사람들이 그들이 사는 둥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마른 개천을 손대기 시작했다. 덮어놓은 잿빛 돌을 걷어내고 풀과 나무를 심었다. 어느 정도 비가 와야만 흐르던 반쪽짜리 개천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늘 물이 흐르게 된 것도 그때였다.
갑자기 시종일관 물이 흐르게 된 것이 신기하여 부모님의 부모님 때 한 용감한 오리가 천을 따라 올라갔다고 했다. 응당 천이라면 물줄기를 쫓아갔을 때 물이 샘솟는 얇은 개울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 둥지 사이에 흐르는 개천은 평평하고 단단한 돌바닥이 이어진 거대한 사각 동굴에서 시작했다. 아무리 용감한 오리여도 그 동굴을 들어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동굴 안에서 거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인데 그 소리는 아마 거대한 사냥개도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굳이 상류까지 올라가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물만 흐른다고 터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물이 막 흐르기 시작한 때에는 일부 부지런한 오리들만 둥지를 틀었다. 그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다. 풀벌레도 이제 막 알을 까기 시작했고, 물고기라고 할만한 것도 피라미 몇 마리뿐이었다. 그나마 이끼는 조금 뜯어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오리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비해 우리를 괴롭히는 대상이 훨씬 더 많았다.
비둘기나 참새가 아닌 새가 사는 것이 신기했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가만히 자고 있는데 물을 뿌린다던가 다리 위에서 쳐다보다가 쓰레기를 던진다던가 함께 산책하는 개가 오리를 위협하려고 달려드는데도 가만히 있는다던가… 심지어는 그렇게 시키는 것 같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옛날에는 사냥개를 대동해서 오리만 전문적으로 잡는 사냥꾼도 있었다니까…
아, 사냥개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냥 주인 없는 떠돌이 개들이 우리를 많이 사냥했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뒤적거리다가 다른 개와의 싸움에서 지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 굶주린 개들이 종종 눈이 뒤집힌 채 개천가를 기웃거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풀을 뒤적거리다가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오리들을 노렸고,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애들이 주로 사고를 당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사람 사이에 사는 개들은 사냥 능력이 떨어져 나이가 찬 오리들은 딱히 무서워하지 않았고, 개도 굳이 다 큰 오리를 노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거리의 개들이 없어지면서 개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는 거의 사라졌다.
수풀은 울창해졌고 이제는 먹을 것도 워낙 많아 굶어 죽을 일도 없다. 장마나 태풍으로 개천이 일 년 중 몇 번 뒤집어지기는 하지만 특정 시기만 잘 피하면 되기 때문에 노련한 오리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큰 물고기들도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물고기들의 크기가 점점 커져 잡아먹기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 많은 오리들이 겁을 먹었었다. 저러다가 도리어 우리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는 것 아니냐며 개천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리고 결국 새끼 한 마리가 물고기에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오리들은 동요했다. 오리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다니! (하지만 새끼가 정말 잡아먹혔는지 확인한 오리는 없었다.) 이 일로 일부는 개천을 떠났다.
사고가 있고 얼마 후, 다행히 한 오리가 가마우지 친구들을 데려오면서 물고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물고기가 너무 커진 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해주었다. 물고기의 크기가 사람이 놓은 돌다리를 지나지 못할 만큼 커지면서 오히려 물고기와 먹이 경쟁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구간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양이는 도시 오리에게 언제나 최악의 위험이고 죽음 그 자체다. ‘개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말에 고양이가 아니라 개가 들어가는 이유는 그만큼 고양이가 위험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보다 조용하고 어떤 동물보다 치명적이다. 고양이가 다가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게 알아차린다면 아무리 빨리 날갯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늦는다. 순식간에 달려드는 고양이는 어떤 동물보다 빠르다. 무엇보다 고양이는 목을 물자마자 숨통을 끊어버린다. 그래서 고양이에게 물리면 정신을 바짝 차릴 기회가 없다. 그들의 사냥은 침묵 속에 스며들어 번개처럼 진행되고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고양이가 쉬이 덤비지 못하는 동물이 있어도 고양이가 이길 수 있는 동물은 적어도 개천에는 없다.
고양이 중 이 개천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녀석의 이름이 ‘나비’다. 잊을만하면 나타나 무리를 혼돈으로 몰고 간다. 감정도 읽히지 않는 나비의 눈빛을 눈앞에서 마주한다면 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대응할 여지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아마 비둘기 쌀알 쪼듯 내 목숨은 진작이 달아나 있을 것이다. 평소에 혼자 고립되지 않는 것만이 사냥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푸드득!
달빛도 없는 깜깜한 밤. 나는 무리와 함께 개천을 따라 날아올랐다. 그리 크지 않은 개천이어도 가끔 사는 곳을 바꿔주어야 먹을 것도 많이 구할 수 있는데, 종종 사람들이 흙놀이를 마친 곳에 새로운 거처를 삼기 좋은 공간이 생기는 경우가 간혹 있다. 양쪽에 가로등을 끼고 다리들을 넘었다. 밤에 움직이면 사람이 적어 여유롭게 주변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때야말로 사람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곳까지 날아가 먹이를 찾을 수 있다.
오늘 밤은 평소 잘 가지 않은 큰 다리 밑에 거처를 삼았다. 이 다리는 임시 거처로 밖에 이용할 수 없는데, 그나마도 깊은 밤 반나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낮에는 뱀을 닮은 거대한 기계가 수시로 지나가 귀가 먹먹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물이 얕고 수풀이 빽빽해 새끼들은 편히 놀 수 있고 어른들은 먹이를 구하기 쉬운 곳이기에 종종 들른다.
사람이 없는 새벽이다 보니 나는 문득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을 가로질러 올라갈 수 있는 다리 밑 틈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두컴컴해서 벌레가 많이 살 것 같은데… 평소에는 길과 개천 사이에 키 큰 사람보다 높은 절벽이 있어 굳이 올라가지 않지만(그 덕에 다른 동물들이 길에서 개천으로 내려오지도 못한다) 오늘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새끼들에게 더 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가뿐히 날아올라 다리 틈 근처에 안착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차갑고 단단한 돌바닥을 딛고 올라가 고개만 내밀어 틈 속을 살펴봤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있어도 뭐가 있다는 걸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냄새에 집중했다. 쾌쾌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가끔 이런 곳에 월척이 있기 마련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사람들이 고양이 밥을 놓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도 그 비슷한 냄새가 난다. 고양이 털 냄새…
잠깐만… 고양이 털 냄새라고…? 나 지금… 어디에 들어와 있는 거지…?
“밥이 입안으로 알아서 들어오는 날도 있네.”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겁도 없이 이렇게 어두운 틈으로 기어 들어가다니… 그래, 누가 봐도 죽고 싶어 환장한 오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여기는 나비의 은신처였고, 나비는 지금 내 뒤에 와 있다. 지금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개천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도 안 보인다. 길이 있다고 한들 날지 않고 나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어서 생각해, 어서!!
“요즘 이가 영 좋지 않아 슬슬 갈 때가 됐나 싶었는데… 도망칠 궁리하는 거 다 보인다. 그런데 네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받아들여.”
나비는 내가 도망치지 못할 것을 알고 아주 여유 만만이었다. 겁을 주면서도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이미 나는 나비의 은신처에 갇혔고, 살아 돌아갈 방법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물갈퀴에 피가 통하지 않아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날개깃 끝까지 저릿하여 날개를 펴지도 못하겠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겨우겨우 뒤로 돌았다. 나비는 언제든 달려들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건지 방금 말한 것처럼 아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나비가 달려드는 순간 열린 틈으로 몸을 던져 개천으로 날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망 없는 방법인 건 알지만 그 방법밖에 없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나비를 노려보며 최후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비가 내 쪽으로 한 발쪽 다가왔다. 차라리 빨리 달려들어라! 나는 그때 재빠르게 달아나면 된다.
“어머, 저거 나비 아니야? 나비야~”
나비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밑에서 빛이 비쳤다. 나비는 빛과 사람 목소리에 놀라 틈 밖으로 도망쳤다. 가끔 새벽에 불빛을 들고 개천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 나비를 아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사람을 싫어하는 나비는 순식간에 어딘가로 숨어들었고, 나는 갑자기 발생한 상황에 놀라 굳어 있다가 나는 것도 까먹고 거의 굴러떨어지듯 허겁지겁 개천으로 달렸다.
그리고 나비는 한동안 개천에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침을 질질 흘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여느 고양이처럼 굶어 죽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주인 없는 개에게 물려 죽지 않았겠냐고 했다. 어떤 오리는 나비가 결국 왜가리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발로 밟히고 부리에 쪼여 개천에 오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이야기도 직접 목격한 바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결국 자기들의 바람이 섞인 뜬소문에 불과했다.
우리는 직접 나비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그 굴다리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무리에서 벗어나지도 않았고 물에서 멀리 떠나지도 않았다. 많은 오리가 나에게 나비에게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물었지만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었기 때문에 딱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몇 주 뒤, 한 오리가 헐레벌떡 날아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생각지 못한 소식을 전했다. 나비가 개천에 나타났는데 사람의 가방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비를 봤다는 곳으로 다 같이 날아갔다. 산책하는 많은 사람들 틈에 한 여자가 큰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있었는데, 그 안에 나비가 앉아있었다.
나비의 표정은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며 기분 좋게 바깥공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낯빛도 좋아졌다. 얼굴은 앙상하고 늘 짜증이 어려 있었는데, 이제는 푸근하고 윤기가 흘렀다. 세상을 보는 눈빛에도 여유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사람들을 응시했고 곧 개천을 바라봤다. 우리와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나비가 사람 둥지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한결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새끼들은 좀 더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었고, 어른들은 둥지를 만드는 데 선택지가 넓어졌다고 좋아했다. 다들 부리에 미소를 띠는 날이 많아졌다.
행복한 식구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 덕일까, 문득 나비는 참 불쌍한 녀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고양이가 혼자 사는 동물이라고 해도 가족이라도 있기 마련이고, 꼬리 섞는 친구라도 한둘 있는 법도 한데 나비는 늘 혼자였다. 새끼는 당연히 없었고, 사람도 매우 싫어하여 사람이 주는 사료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개는 나비를 보며 늘 짖었고, 개천에 모든 동물들은 나비를 보면 도망쳤다.
나비는 언제나 외롭지 않았을까. 늘 몰려다니는 우리와 달리 쓸쓸한 삶을 살았던 동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을 만난다면… 다른 동물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사람 품에 안겨있던 나비를 떠올리며 나비가 더 이상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고 따뜻한 삶을 살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