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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봉주 May 30. 2024

나는 나를 열연熱演한다

칼 라거펠트

I only know how to play one role: me.


나는 오로지 하나의 역할만 연기할 줄 안다. 바로 나.


-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독일, 1933-2019),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 독일의 국가수반으로 취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던 1933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모차르트를 연상케 합니다. 패션에 천재성을 보이며 3세 때 옷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옷감을 구분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하죠. 드로잉이 뛰어났던 것은 물론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책을 읽고 공상하기를 즐겼으며 특히 예술과 옷을 좋아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 덕에 20살에 어머니와 파리로 이주하여 삽화가로 일하고, 이듬해는 프랑스의 명문 패션 학교인 파리 의상조합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국제양모사무국 콘테스트에서 울 코트 부문에서 1등을 수상하며 파리 패션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합니다(같은 대회 이브닝드레스 부문의 우승자는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칼 라거펠트는 피에르 발맹Pierre Balmain 하우스, 장 파투jean patou 등을 거치며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그는 보수적인 파리의 패션계에 싫증을 느끼며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때 마리오 발렌티노Mario Valentino, 크리지아Krizia, 찰스 주르당Charles jourdan 등을 거치며 자신의 방향성을 고민합니다.


 1960년대 초반, 당시에는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는 기성복 디자이너Stuliste로 활동하면서 젊은 안목과 빠른 유행의 변화를 직접 맞닥뜨리며 감각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1964년, 프랑스 브랜드 끌로에Chloé에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하여 끌로에 컬렉션을 패션 미디어의 헤드라인에 올립니다. 다음 해에는 이탈리아의 펜디Fendi에서 제안을 받아 브랜드 혁신을 주도합니다. 펜디의 상징인 더블 F 로고 제작에도 참여하고, 전통적으로 무겁고 사치스러운 느낌으로 소비된 모피 소재를 가볍고 세련된 패션으로 변화시키며 펜디를 세계적인 토털 패션 브랜드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이후 1974년 고국에서 본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선보입니다.


 1982년, 파리 패션계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프랑스의 자존심과 같은 샤넬Chanel이 독일인(!)이자 기성복 디자이너(!!)인 라거펠트를 영입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입니다.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여론은 당시 한없이 약해지고 있던 파리 패션계의 위기 속에서 샤넬의 혁신 의지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샤넬은 칼 라거펠트가 그동안 보여온 변화무쌍함과 상업적 성공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물론, 그가 수년 동안 파리 패션계에서 경력을 쌓았다는 것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후 칼 라거펠트는 '샤넬의 황제'라고 불립니다.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며 샤넬의 근본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나 브랜드의 역사 전반을 검토하고 핵심 디자인에 동시대의 감각을 더하며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였습니다. 동시에 샤넬의 젊은 변화와 하이엔드 브랜드로서의 샤넬의 품격을 동시에 잡습니다. 샤넬의 컬렉션만을 위한 값비싼 소재들을 파리 패션계에서 조달했습니다. 깃털 공방 르마리에Lemarie,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단추 공방 데뤼Desrues, 구두 공방 마사로Massaro 등 당시 프랑스 최고의 수공예 공방들과 협력하여 샤넬을 일약 패션 제국으로 올려놓으며, 그가 샤넬에 처음 영입될 때 파리 패션계의 반발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2019년 2월, 췌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샤넬과 함께 합니다.




 칼 라거펠트의 삶은 '당당함'으로 압축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감에서 솟아나는 행동력은 그를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변화로 밀어붙였습니다. 독서를 즐겨 서점 '7L'과 출판사 'LSD'를 창립하고, 디올Dior의 정장을 입기 위해 42kg을 감량한 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고 하죠. 마음에 드는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해 스스로 사진을 공부해 작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살아온 여정에서도 자존감이 느껴집니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기성복 디자이너로 거리낌 없이 활동하여 경력을 쌓고 이후 인정받아 샤넬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를 반대하는 여론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기획자 직을 수락했습니다.


 이 당당함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살펴봅시다. 문장에는 'only'와 'one'으로 '유일성'이 두 번이나 강조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play'한다고 말합니다. 영어에서 'play'는 연기, 놀이, 경기를 모두 의미하며 그 구분이 엄밀하지 않아 문맥상으로 구분하는데, 사실 그마저도 쉽지는 않습니다. 저는 뒤의 'role'에 집중하여 '연기'에 초점을 맞춰 해석해 보았습니다(물론, 놀이와 경기 모두 역할과 기대 행동이 있다는 점은 동일하기는 합니다).


 'play'를 연기로 한정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 대사는 어떤 장면에서 등장할까?'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문장에서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으니, 아마 그에 앞선 대사는 유일성을 부정하거나 의문을 표하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혹은 다른 역할을 주문했을 수 있지요. 그때, 이를 강하게 거부하며 '나는 나라는 역할만 연기할 줄 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역할은 연기자가 스스로 선택한 배역일 것만 같은 강한 확신이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 라거펠트가 어떤 연기자였을지 그려집니다. 저는 어렸을 때 종종 세상이 연극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대 장치와 연출, 관객은 이미 정해져 있고, 아주 먼 과거부터 이미 어떤 대본에 의해 극은 진행되고 있는데 나에게 어떤 사전 설명 없이 이 '연극'에 뚝 떨어졌다는 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라거펠트는 스스로 주연이라고 철저하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앞서 시연된 대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자기 역할을 현란하게 연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인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결정짓는 요소 중 거의 모든 것(국적, 성별, 환경, 외모 등)이 주어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를 통해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오직 자신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비관적인 한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 라거펠트는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너무나 경탄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기도 했고,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비난받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당당함'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삶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己를 강조한 칼 라거펠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체의 개성과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추함에 대한 혐오를 보여왔고, 그 추함에 관한 기준과 모욕은 심각할 정도로 가혹했습니다. 2003년 보그Vogue와의 인터뷰에서 '못 생기고 키도 작은 남성은 비열하고,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할 것'이라고 말하고, 공개석상에서 '아무도 뚱뚱한 여자가 런웨이에 서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여기서 말하는 '뚱뚱한 여성'은 비만이나 과체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커머셜 모델과 피트니스 모델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충격적입니다. 한 마디로, 하이엔드 브랜드의 패션쇼에 올라오는 아주 마른 모델이 아니면 '뚱뚱하다'는 것이죠.


 그가 하이엔드 브랜드에 종사하며 수많은 런웨이를 기획하고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이루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가 일관되게 '하이엔드 브랜드에 걸맞은 마른 모델'을 추구하는 것은 직업 환경과 업계 문화를 비춰보면 이해가 안 될 것은 아닙니다(뚱뚱한 여자가 설 수 없다는 '런웨이' 역시 하이엔드 브랜드의 패션쇼에 한정된 말이니까요). 하지만 그의 '추' 혐오는 2012년 선을 넘고 맙니다. 그는 '마른 모델을 욕하는 여성은 뚱뚱한 여자들뿐'이라고 말하며, 불필요하게 가수 아델Adele을 언급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아름답지만 너무 뚱뚱하다고 덧붙인 것이죠.


 논란이 커지자, 라거펠트는 인터뷰를 통해 '사람들이 느끼는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해한다'고 말하며 '나는 아델의 팬이며 그를 존경한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말은 종종 언론에 부풀려지는 경우가 있다'며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언론 탓을 하기에 그의 뚱뚱함과 추함에 대한 혐오는 너무나 일관적이었습니다. 2019년 2월 19일 그가 사망한 다음 날, 미국의 언론 복스Vox는 '칼 라거펠트의 길고 길었던 뚱뚱한 여성 폄하 역사Karl Lagerfeld’s long history of disparaging fat women'라는 기사를 썼을 정도죠.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직접 입고 시장에 내보일 모델에게 자신이 가진 '마름과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를 투사하고 특유의 완벽주의적 기질은 컬렉션이 자기가 생각한 모습으로 세상에 소개될 것을 기대하여, 점점 모델을, 나아가 모델을 보고 옷을 구매할 여성 전체를 자신이 투사한 '마름과 아름다움'에 가둬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못생긴) 남성을 향해서도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그는 여성 모델에 아름다움의 기준을 더 단단하게 강화하고, 하이엔드 브랜드의 고객 역시 그 기준에 걸맞은 사람이기를 기대('당신이 조깅 팬츠를 입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등 의상과 아름다움이 인격을 대변한다는 듯한 발언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했기에 '마른 여성'이라는 신화에 열성적으로 기여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델에 국한하여 말하지 않고, 기어이 가수 아델을 '뚱뚱하다'고 언급한 것처럼 말이죠. 신체를 좋은 컬렉션을 위한 옷걸이 정도로 취급하는 멸시의 일관성은, 그가 1933년에 태어났고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 마른 몸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참작되는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본 연작은 출판사 '어반북스'의 《문장수집가》 프로젝트의 첫 번째 책 <LOVE MYSELF>에서 발췌한 29편의 문장을 기반으로 구성됩니다. 《문장수집가》의 <LOVE MTSELF>에는 '자기 사랑'에 대한 100여 편의 문장이 멋진 캘리그래피로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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