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가 알려준 사랑
요즘 취업만큼이나 내 일상을 흔드는 걱정이 있다. 야옹이 어디갔지, 터를 옮겼나. 새로 온 고등어는 어디 갔지? 집앞에 생긴 어린이집때문에 피했나? 누가 괴롭혔나? 밥은 먹는 것 같은데. 닭가슴살을 둬야 하나.
1년을 본 길고양이가 요즘 보이지 않는다. 덩치가 크고, 사람을 좋아하며, 애교가 많은 코숏. 나는 이 친구를 야옹이라 부른다. 주민들은 자신만의 애정이 담긴 이름을 부른다. “나비다, 나비!" "언니. 누렁이랑 친해요?" "아이고, 또 발라당 눕네." 이상하리만큼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이상적인 반응이었다.
1년 전,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야옹이는 그렇게 이 골목의 사랑이 됐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고양이가 고양이답지않게 30초만 있어도 다리에 얼굴을 부비작댔다. 그리고 발라당 누워,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물과 간식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한 할머니는 집앞에 밥과 물그릇을 준비해 식사를 챙겨줬다. 누군가 장난감과 스크래쳐를 뒀다. 그리고 이제는 번듯한 집까지 생겼다. 오르막길 구석에 있던 야옹이는 집앞에 들어가서 골골거린다.
야옹이는 그렇게 잠깐 등장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훌쩍 떠난 길고양이가 아니라, 자신의 오롯한 공간을 가진 주묘(?)가 됐다. 이름도 모르는 우리가 야옹이하나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빈번해졌다.
나는 빠르게 야옹이와 친해졌다. 멀리서 "야옹아!"하면 정말 말 그대로 "야옹"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엉덩이를 토닥이다가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 또 "야옹"하고 울며 내 앞을 막는다. 고양이는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지 검색해, 턱을 긁어줬을 땐 신기했다. 꼬리를 올리는 것도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니. 우리는 이제 나름의 대화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각자가 자신의 할 말만 하는 대화겠지만.
가끔 집앞까지 따라오는 날이면 마음이 씁쓸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걱정이 온종일 나를 지배했다. 며칠간 안 보이면 잠깐 놀러갔나, 싶다가도 어디서 싸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그러다 늘 그랬듯, 야옹이는 골목에서 식빵을 굽고 있었다. 야옹이를 보면, 사사로운 걱정과 고민들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내 일상에서 야옹이가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커졌다. 야옹이에게 바라는 게 딱 하나 있다면, 무탈하게 이 골목에서 사랑받으며 지냈으면 했다. 나를 위한 작은 이기심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야옹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꼈다.
예전엔 길고양이를 보면, 무작정 다가가 길고양이를 겁먹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멀리서 물과 닭가슴살을 내어두고, 내가 보이지 않을 벽에 숨어 먹는 것을 지켜본다. 다 먹고 고양이가 자리를 비키면, 그 때 접시를 수거한다. 나는 그렇게 이 도시의 길고양이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웠다.
길고양이를 챙겨주지 말라는 의견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지 충분히 이해한다. 고양이는 발정기가 오면, 정말 아기가 울 듯 소리를 친다. 배고파서 사람들이 버려놓은 쓰레기봉투를 찢어, 음식물을 길거리에 늘어놓는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TNR을 한 길고양이는 발정하지 않고, 먹이를 잘 챙겨주면 거리가 더러워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길고양이는 유기묘다. 우리는 동물과 함께 공존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한다.
어쩌다 길고양이를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내가 사랑하는 우리 야옹이때문이다. 야옹이에 대한 사랑은 길고양이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됐다. 길고양이를 버려두자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충분히 길고양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