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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ul 14. 2020

무결해야 하는 피해자와
그 정도는 괜찮은 가해자

박원순 시장을 고발한 피해자와 연대합니다

죽음만 남고 죽음의 이유는 사라졌다. 마치 그 이유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다 같이 작정이라도 한 듯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박원순 시장의 실종과 성추행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 연이은 사망 소식보다 나를 더 큰 충격에 빠뜨린 것은 사건 이후 반응이었다. 서울시에서는 분향소를 설치해 성대하게 추모했고, 몇몇 정당에서는 그의 뜻을 받들겠다는 플래카드를 곳곳에 내걸기 시작했다. 추모를 거부하는 이들은 인간애라곤 없는 악독한 페미니스트 혹은 진보 인사의 추락에 신나서 낄 때 안 낄 때 구분 못 하는 꼴통 보수로 치부되었다. 꿈을 꾸나 싶었다.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착잡함이 들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배은망덕한 여성들을 꾸짖으며 '나머지 모든 여성이, 그만한 '남자사람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원순을 빼고, 한국 여성사를 쓸 수는 없을 겁니다'라고 했다. 이보다 통찰력 있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성범죄 피해 여성을 대변하던 인권변호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시장에서 위력에 의한 성추행 가해자로 추락해버린 인물을 빼고 어떻게 한국 여성사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그런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라면 남성주의의 오만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다. 박원순 시장이 여성 운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고 해도, 한국 여성사를 써내려 온 주체는 엄연히 한국 여성이다. 누구도 그에게 빚을 진 적 없다. 


어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자회견'이 열렸다. '고인에 대한 예의도 없다', '죽음으로 죗값을 치른 사람에게 할 짓이 아니다'라는 또다른 2차 가해를 지켜보며, 우리 사회의 피해자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하고, 지배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태껏 가만있다가 왜 이제야 난리야'라고 비난받는 피해자와
'사람이 살다 보면 그 정도 실수는 할 수 있지'라고 정당화되는 가해자 
완전 무결해야 하는 피해자와 사회가 발 벗고 나서서 서사를 만들어주는 가해자



또 권력형 성범죄가 무엇인지,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던 박원순 시장이 어쩌다 자신이 표방하던 길과 정반대의 길에 들어섰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순적인 삶에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법과 정의로 세운 자신의 세상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의혹을 영원한 의혹으로 남기고 떠나길 택한 그를 이해하려 너무 애쓰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내 손으로 뽑은 시장, 탁월한 행정가라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할 수 없다. 피해자가 쓴 입장문의 첫 문장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회한과 반성으로 시작해야 하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사의 존엄과, 이름도 모르는(이름을 감춰야 하는) 한 사람의 존엄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기에. 


여자로 태어나 신체 결정권을 모조리 박탈당하고 능멸당하는 경험이 없었던 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여기는 나로서는, 이 사건 앞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쓸 수도 없다. 그보다 먼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나의 책무라 느낀다. 박원순 시장을 고발한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와 연대한다.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7120923523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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