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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ul 27. 2020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곧 만 나이로 서른이 된다. (외국에 있으니 한국 나이는 잊고 살기로 한다.) 스무 살 즈음에는 서른을 인생의 대단한 기점으로 여겼다. 십 년 후면 완벽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겉모습은 커피프린스의 한유주처럼 세련되고 우아한 여자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 그냥 예전의 나와 똑같은데, 단지 얼굴에 찍힌 베개 자국이 좀 더 오래간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누가 봐도 멋진 일을 하며 사회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있을 줄 알았다.

- '이게 정말 옳은 길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MBTI 결과 중 추천 직업을 가장 유심히 읽는다.


꿈같이 달콤한 사랑을 하고, 여생을 함께 할 영혼의 단짝을 만날 줄 알았다.

- 매번 설렘으로 시작한 만남은 삐걱거리다, 눈물 바람으로 끝이 났다.



서른 살, 기대하던 장밋빛 인생은 없다.


어느 하나도 예상(혹은 망상)에 들어맞지 않았다. 아직도 불확실이 지배하는 삶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도 스무 살의 나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게 있다면 훨씬 씩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고 자란 도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익숙한 곳을 벗어날 때마다 내 안의 작은 세계도 함께 확장되었다. 키가 갑자기 자랄 때 무릎이 아픈 것처럼 내 세계가 커질 때도 성장통이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을 깨부수기 위해선 크고 작은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런 순간을 숱하게 만나다 보니 여전히 아프긴 하지만, 아픔에 아주 조금은 더 의연해졌다.


게다가 해보지 않은 것과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 아직도 차고 넘친다는 사실이 심장을 뛰게 한다.

어느 날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못한단 말을 들은 친구가 말했다.

무서워서 안 해본 거야? 해본 적이 없어서 무서운 거야?

귀신 같이 날카로운 질문 앞에 어버버 했다. 내 경우 확실히 후자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 목욕탕에 빠져서 허우적대던 기억 빼고는 물에 대한 큰 트라우마도 없었으니. 미뤄오던 숙원 사업인 수영을 배우기 위해 그날 당장 수업에 등록했다. 난생처음으로 온몸을 동원해 물속에서 나아가는 법을 익혔다. 이후 수업을 들을 수 없어 초보 수준에 머물러있지만, 작은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놓쳤을 감각과 희열을 알게 됐다.


'일단 해보자'는 나를 나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한마디다. 씩씩하게 내린 결정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내일의 나도 만들 것이다.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우선 도전하려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허점 투성이의 불완전한 내 삶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헤매면 또 어떤가. 주어진 한 번의 삶을 나의 쓸모를 발견하기 위한 끝없는 여정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최근 시작한 글쓰기 또한 그 여정의 일부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노랫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안 하느니만 못한 연애도 있을 테니. 연애도 결혼도 나 좋을 대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한 사람이 쌓아 온 미지의 세계가 물밀듯 들어오는 경험은 분명 특별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무엇보다 내가 모르던 나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물론 하찮고 보잘것없는 내 모습과 마주할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도 나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귀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 그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 기쁘다.



어느 하나 이룬 게 없는데 무슨 잔치.. 싶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부지런히 모험해온 기특한 시간들을 기념하고 앞으로의 모험도 응원하기 위해 서른, 잔치를 시작한.  


언제든 다시 이 글을 읽어도 '잔치는 계속되고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길 소망한다. 성대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날마다 깊이를 더해가는 나만의 풍성한 잔치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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