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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Oct 15. 2020

살아 움직이는 나의 그림엽서

스위스 블라우제, 외시넨 호수 여행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배낭 하나 무심하게 걸치고 유유자적 걷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관광객이라기보다는 여행자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근사한 사람들의 대열에 끼고 싶어 혼자 여행을 제법 했고, 즐기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중 홀로 여행을 그만둔 계기가 있었다. 작년 2월 마요르카 섬에 갔을 때 일이다. 지중해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겨울에도 유럽 곳곳에서 가족과 커플들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딜 가도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식당에서도 혼자 와서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시켜먹는 아시아 여자 관광객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이미 기가 죽어서 그런지 시선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하루 한 끼는 좋은 식당에서 잘 먹기'라는 나만의 여행 철칙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는데... 군중 속의 절대 고독을 맛본 뒤로는 동행이 있을 때만 여행을 했다. 한때 떠나는 일에만 열중했다면, 어느새 누구와 함께 떠나는지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혼자 여행을 하게 된 것은 단지 미리 사둔 표를 날릴 수 없어서였다. 한적한 평일에 산행을 떠나고 싶어 표를 사두었다. 하지만 휴가철도 아닌 때 함께 할 친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스위스 데이 패스 (carte journalière)는 지정한 날짜에 대중교통(기차, 버스, 트램, 일부 배와 산악 열차)을 종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 시에서 판매하는 표 :  45프랑 내외, 주소지가 시에 등록된 경우만 구입 가능, 수량 한정
- 스위스 연방철도 SBB 표 : 75프랑~/ 반액권 소지시, 49프랑~  



결론부터 말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난 여행은 황홀, 그 자체였다. 무르익어가는 가을 풍경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매번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전망이다. 스위스 서쪽 끝에 있는 제네바에서 타 도시로 갈 때면 항상 이곳, 라보 지구(Lavaux)를 지난다. 로잔과 브베 사이 광대한 포도밭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실제로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호수를 따라 난 포도밭 사이로 트래킹을 하거나 와인셀러 투어를 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아침에는 구름이 잔뜩 껴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인터라켄 근교의 블라우제 호수(blausee)다. 베른에서 내려서 프루티겐(frutigen)으로 향하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슈피츠(Spiez)를 지날 무렵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차가 중간에서 나눠지니 프루티겐으로 가는 사람은 기차 앞 쪽으로 옮기란다. 이런 경우도 다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는 한참 멍 때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보니, 내가 타고 있는 칸은 전혀 다른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뒤늦게 후다닥 내렸다. 기차가 중간에서 분리되었고, 나는 떠나가는 앞 기차의 꼬리만 황망히 바라봤다.



그렇게 슈피츠 기차역에 남겨졌다. 슈피츠는 예쁘지만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다. 이미 구석구석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다음 기차는 한 시간 이후에 온단다. 역 밖으로 나가니 눈부신 풍광이 반기고 있었다. 기차를 놓치지 않았다면 이 광경을 놓쳤겠지! 마침 날이 개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여행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도 탓할 사람은 나뿐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빈둥거리다 보니 금세 기차 시간이 됐다. 프루티겐에 도착해 다시 블라우제 호수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다. 나와 같은 어이없는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제네바부터 세 시간의 여정이다.



블라우제 호수는 이미 스위스를 찾는 관광객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물씬 다가온 가을이 느껴진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이곳에서 자연이 빚어내는 놀라운 색을 마주했다.

찬란한 풍경이다. 너무 멋진 장면을 보면 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며 선녀탕에 와있다고 했더니, 비유가 촌스럽다며 웃었다. 그런데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에메랄드빛 호수에서는 정말이지 선녀라도 나올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사랑에 빠진 인어의 눈물이 모여 호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로맨틱한 서양식 전설이다. 인어가 아닌 선녀를 떠올리는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10프랑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나룻배도 무료로 탈 수 있다. 이곳은 스위스 최대 송어 양식장이기도 한데 호수를 들여다보면 팔뚝만한 송어가 보인다. 공원 식당에서 송어 구이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호수만 쳐다보며 몇 시간은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외시넨 호수(Oeschinensee)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창밖으로는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평화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해발 1,578m에 있는 호수니 케이블카를 타기로 한다. (등산길도 마련되어 있다.)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 벌써 멋져서 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아기자기한 블라우제 호수와는 또 다른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케이블카에서 호수까지는 20분이 걸린다고 한다. 3보 1배가 아닌, 3보 1감탄을 하게 되는 대자연의 풍경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며 걷다 보니 훨씬 오래 걸렸다.

도보로 걷는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고 하나같이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 걷는 사람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이 산하 대지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위해서보다는 우리의 두 발을 위해서 예부터 있어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 속에는 미묘한 자력이 있어 우리가 무심히 거기에 몸을 맡기면 그 자력이 올바른 길을 인도해 준다고 옛 수행자들은 믿었다.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사람만이 그 오묘한 자연의 정기를 믿을 수 있다. - 법정스님, 홀로 사는 즐거움 中



호수가 보인다. 두근두근



호수를 빙 둘러 세 시간 정도 하이킹을 할 수 있다고도 한다. 위에서 호수를 내려보는 것도 또 다른 장관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마지막 케이블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겨우 한나절 여행으로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마냥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번 나들이로 다시 홀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자신감을 비축했다. 소란한 일상에서 벗어나 홀로 고요해지고 싶을 때, 주저 않고 훌쩍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그림엽서와 같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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