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이 끝날 무렵 요리 파업에 들어갔다. 그동안 삼시 세끼를 해 먹느라 진이 다 빠졌기 때문이라는 게 대외적인 명분이었다. 분명 한 이유였을 테지만 더 큰 이유는 나를 먹이는 일, 다시 말하자면 나를 돌보는 일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밥을 차려 혼자 먹는 일에 더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재료를 사서 손질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 시간은 족히 드는데, 해치우는 건 순식간이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즈음 겪은 이별도 한몫했다. 전 연인과 주말 한 끼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서인지 헤어진 이후로는 대단한 요리를 하는 것도, 집에 사람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모두 두려워졌다. 천장이 높아서인지 쓸쓸하고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부엌이었다. 그곳에서 꺼이꺼이 우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 말은 정말이었고, 나는 그렇게 부엌과 멀어졌다.
이동제한령 동안 해 먹던 요리, 이제 보니 왜 질렸는지 알 것 같기도...
살벌한 물가를 자랑하는 스위스에서 외식으로만 연명한다면 한 달도 안 돼 파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요리 파업이 한창이라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으니 식욕도 덩달아 줄어들면 좋으련만, 역시나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내가 택한 전략은 최소한의 시간 투입하기, 불은 가능한 쓰지 말기, 한번 불을 켜면 대량 생산하기 등이었다. 요리보다 조리에 가까운 즉석식품을 애용했다. 스위스 즉석 음식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스위스의 식문화를 반영하듯, 그 세계는 한국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지루하고 단순했다. 그 와중에 다행이었던 건 얼마 전부터 현지 마트에서 한국 라면을 쉽게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는 한국 라면, 스위스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K-빨간 맛과 채식주의자를 위한 비건 라면
즐겨먹던 두부 카레와 비건 스테이크, 비건은 아니지만 채식 메뉴를 즐긴다
이 파업의 문제점은 아무도 아쉬울 게 없다는 것이다. 파업의 요구 사항도 없었고, 있다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내 몸만 상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업이라기보다는 권태기에 더 가깝겠다.
한국이라면 요리 권태기가 오면 밖에 나가서 좋은 음식을 사 먹으면 그만이다. 나의 최애 음식(예를 들어 뼈해장국이나 김밥)을 매일 사 먹는다고 해도 가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먹을 것을 만드는 행위와 먹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붙어 다니는 것이었다.
나를 갉아먹는 이 파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게다가 평소 요리가 내게 주던 순수한 기쁨을 생각해보자. 재료를 다듬고 썰고 굽는 그 단순한 움직임에서 얼마나 큰 평온함을 느꼈었나. 내가 나서서 평화를 빼앗은 셈이었다.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어 '먹는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잊고 있었다. 먹기 위해 준비하는 일도 먹는 일만큼이나 신성하다. 그 행위에 정성을 다하지 못해서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먹는다는 것은 살기 위한 가장 원초적 행위다. 그 동물적인 행위에 정성을 들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자신을 부지런히 사랑하는 시간으로 바뀐다. 냉장고를 찬찬히 살피며 자투리 재료를 이용해 뭘 만들지, 점심엔 피자를 먹었으니 뭘 해 먹어야 영양의 균형을 맞출까 머리를 굴리는 것, 다 고도의 창의력을 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시간을 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맛보는 일은 밋밋하게 스쳐 지나가는 날들에 경쾌한 배경 음악을 까는 것 같다.
어제 해먹은 수제비, 반죽이 쫄깃쫄깃 잘 됐다. 야무진 내 손 끝이 예뻐보일 때
상황이 상황인지라 좋은 걸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그동안은 우선 나를 잘 대접하기로 한다. 네 시만 되어도 어둑어둑해지는 건 유럽의 기나긴 겨울이 훌쩍 다가왔다는 뜻이다. 긴긴 저녁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계절이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한 끼를 위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