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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모지민 Apr 05. 2023

작두 이야기

때는 이천이십삼년 이월이십삼일

장소 남산국악당


한국즉흥음악축제가 있던 날

리허설 시간 정오 보다 한 시간가량 일찍 도착하여 따스운 커피를 마시며 벤치에 앉아 있는데 문득 예술가로 살고 있음에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 회사원들은 눈 비비고 일어나자마자 지긋지긋한 회사에 가서 지긋지긋한 얼굴을 마주하며 지긋지긋한 인사를 나누고 지긋지긋한 업무를 지긋지긋하게 보다 지긋지긋한 퇴근길에 차는 막히고 지옥철 안에 콩나물시루처럼 지긋지긋하게 피로한 육신으로 지긋지긋하게 끼여서 집에 돌아가 지긋지긋한 한숨을 퍽퍽 내쉬며 저녁상에 소주 한잔 들이켜고 지긋지긋한 하루를 마치는데 나는 봄이 오는 이 아름다운 시간에 아름다운 극장에 와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답게 공연을 한다는 게 그저 하염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더라

그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여 무대에 오른 날

믿기진 않겠지만 접신 경험했잖아. 신명 나서 당실당실 흔들어대는 무아지경이 아닌 그날은 분명코 내가 아닌 타자가 내 안으로 침범했어

무대에 발을 딛자마자 발바닥에 전기가 오르고 무언가에 빙의되는 기분을 느끼는 찰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 내 안으로 쑥 들어오면서 몸이 파드득 떨리더라. 마치 무당이 접신 들린 거 마냥

순간 눈의 동공이 커지고 미친 듯이 깜빡거리더니 완전 다른 존재로 급작스레 변하더라

짙은 안개가 들러붙은 무대에 눅진하게 깔린 공기를 훅 들이마시고 가만히 아주 가만히 발끝으로 바닥을 쿡쿡 찔러가며 무대를 찬찬히 밟았어

춤을 추려고 하는데 귀신이 잠자코 있으라며 내 사지를 묶더라

뿌리치고 춤을 추려는데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어

쉴 새 없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손으로 입을 벌려 찢고 찡그러트린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몸뚱이와 얼굴을 사정없이 쳤어

애써 춤을 추지 않는데도 그 자체로 그 큰 무대가 꽉 채워지는걸 온몸으로 느껴졌어

그간 십수 년간 해온 것들은 학습화된 것들로 때우기 급급했다면

그날은 별다른 동작 없이 무대에 또 다른 자아와 내가 충돌하면서 그저 온전히 무대에 가만히 아주 가만히 존재했어

반대로 에너지는 테크닉을 구사할 때보다 10배는 더 많이 쏟아부었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더라

춤을 추지 않아도 존재함으로써 무대가 완전히 채워진다는 걸 그 순간 처음 깨달았어

얼굴을 일 그러 뜨리고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오만가지 표정을 지으며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을 하염없이 주시했어

조명은 나를 타 죽을 듯이 비추고 내 혼이 그 빛을 사정없이 빨아들이더라

가슴을 치고 소리릴 지르고 바닥을 얼마나 쳤던지 끝나고 나서 손바닥이 너무 아픈 거라

공연 마지막엔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 그 눈물을  훔치며 턱밑으로 매가리 없이 떨어지는 콧물과 눈물을 서럽게 닦았어

사람들은 숨 죽여 내 끊임없이 변화하는 표정, 공기를 타고 흐르는 호흡,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아주 세세하게 하나하나 지켜봤어

꼬박 30분을 그냥 그렇게 애타게 아주 애타게 내 안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 절망, 상처를 표출했어

사납게 울부짖고 맺힌 응어리가 증폭되면서 막바지엔 극렬한 몸짓으로 포효하다라

나는 더 크게 소리 지르고 더 세게 가슴을 후려 쳤어

목 놓아 우는데 통쾌함과 짜릿함이 무대 천장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어. 천 년 묵은 체증이 가시는 거 마냥 그렇게나 시원하더라

시간은 정체되었고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서 끝이 없기를 바랐어. 밤새 그냥 그렇게 있고 싶더라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열광했어. 그 엄청난 환호에 경직된 몸이 서서히 누그러질 듯 말 듯 끝나도 끝난 게 아닌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완연한 무대 었어

십수 년간 해오면서 공연이 완벽하다고 느낀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어

집에 돌아오면서도 미쳐 날뛰는 감정이 가라앉지 않고 턱 밑으로 간신히 밭은 숨을 쉬고 있었어

아 이게 춤이구나. 그동안 해 온건 무얼까. 엄청난 감정이 교차하더라

무당이 작두를 타면 이런 기분일까.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저 덩실덩실!!!

전에는 무대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자신 없어서 주춤거렸던 행위를 내가 아닌 다른 자아가 그 짓을 기어코 해내게 만들더라

이제 나는 그 어떤 무대에서도 내가 원하는 모든 걸 당당하게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어

완벽하게 그 시간으로 흡수되어야만이 가능한 일

한 순간이라도 내 정신으로 돌아오면 순식간에 몰입은 흐트러지고

그때부터 다음엔 무얼 해야 하지 하고 허겁지겁 망설이지 않을 확신을 그 소중한 것을 비로소 터득했어

무대에서 허우적거리며 버텨온 세월 속 무려 23년 만에!!!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것을 이 날의 공연으로 운명처럼!!!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을!!!

그리하여 그날은 인생 공연이 돼버렸어

예술이란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알게 되었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강렬했던 그 시간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야

이제 내가 앞으로 설 무대에서 적어도 행복하게 울부짖을 수 있을 거 같아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날의 깨달음으로 다음날 바로 이어진 보안여관에서의 공연에서 이틀연장 작두를 탔어

꼬박 1시간 20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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