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장애를 도와주는 나만의 평정심 매뉴얼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는 없어. 그게 인생이야.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그걸 알아가는 게 인생이고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배워왔다. 참고 양보하며 사는 것, 이상보다는 현실에 맞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겼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 생각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참으면 병이 된다’ 말은 심리학적으로 ‘참’인 명제다. 원하는 것은 참거나 묻어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나 욕구(미해결 된 문제)는 나도 모르는 새 비집고 튀어나온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몇 안 되는 귀한 지식이기도 하고 내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원하는 바를 표현하려면 우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명확히 알아야 한다. 현실치료 이론에서는 이를 ‘바람(Real Want) 탐색’이라 일컫는다.
나고 자라길 남이 원하는 대로 했을 때 마음이 편한 나에겐 바람 탐색이라는 것은 수리영역 마지막 3점짜리 문항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최근 일이다. 7월부터 연구회에서 마음 맞는 선생님들 몇몇이 모여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제작 중이다. 그러던 와중 그림책 팀장인 선생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번에 첫 그림책을 완성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동안 새로운 그림책 하나 더 만들어 볼까 하는데, 혹시 효리 선생님이 맡아서 해보시지 않을래요?”
쿠궁. 심장이 요동을 쳤다. 그림책을 써보는 것은 사실 나의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버킷리스트는 모른 체하며 단번에 답을 해버렸다.
“제안만으로 정말 감사해요. 너무 해보고 싶은데 요즘 제가 임신 준비 중이라 생각을 좀 해볼게요.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아기 키우고 도전해보죠 뭐.”
내 머릿속이 시끄럽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5분도 채 되지 않았던 짧은 통화가 계속 생각이 났다.
평소 나는 그림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림책으로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서 내손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교과서만 펴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녀석들의 시선이 그림책에 꽂혀, '아', '오', '헐' 하며 입을 벌린 채 수업에 진하게 빠져 있을 때 그 모습이 그리도 사랑스럽고 뿌듯한 것이었다. ‘공부하는 줄 몰랐는데 공부가 되는 수업’을 지향하는 나에겐 그림책은 더없이 좋은 교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 꿈이 실현 가능할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다. 다락방에 모셔놓곤 이따금씩 열어보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그래, 그림책을 만들어 보는 것도 내 꿈 중에 하나였지’ 하며 추억하기만 했다.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임신' 계획이라는 말로 내 스스로를 가두어버렸다. ‘좋습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이유에는 '난임'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결혼 후 임신을 준비하는 동생들, 몇 번의 유산 끝에 어렵게 엄마가 된 친구와 언니들의 경험을 통해 나 역시도 ‘난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그림책 작업은 적어도 6개월에서 많게는 1년 정도는 걸릴 것이다. 1년이면 내년 하반기인데 그즈음이면 이사와 전근이 맞물려 임신에 걸림돌이 될 요소들이 많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손안에 내가 구상한 스토리로 만든 그림책이 생긴다는 것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글자로서만 존재했던 내 버킷리스트가 실현이 된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감격스럽고 벅찼다. 길어도 1년이고 바짝 하면 더 일찍 끝날 수 있는 작업이기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초산치고 많은 나이는 아니니까 건강하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야.’라고 합리화하며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홑몸 라이프를 그림책으로 아름답게 장식할 생각에 한껏 부풀었다.
그렇다고 팀장 직을 맡자하니 임신이 덜컥 되었을 때 마무리 짓지 못한 남은 일들과 갑작스럽게 바통을 이어받아야 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중요한 선택을 할 때일수록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나는 ‘그림책’이 아닌 ‘임신’을 선택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삼일 간 ‘씁쓸함’과 ‘달콤함’ 사이를 수십 번 왔다 갔다했다. 이번만큼은 결정이 너무 어려웠다. 자이언티 노래 가사처럼 그럴 때면 꺼내 먹어 보는 것. 바로, 나만의 평정심 매뉴얼이다. 하나씩 차근차근 실천해보기로 했다.
1. 요가하거나 산책하기
마침 요가를 가는 날이라 요가원에 갔다. 운동을 하면서도 좀처럼 시끄러운 속내가 조용해지질 않는다. 그럴 때일수록 고민의 무게만큼 뻗어내고 이완시킨다.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땀과 가을바람이 만나 시원해진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답답함은 있지만 기분 전환은 된다.
2. 글로 써보고 두 선택의 장단점 비교해보기
집에 와서 글을 써본다. 요즘 따라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모니터 앞에 멍하니 있는데 이렇게 고민이 있는 날이면 키보드에 전쟁 난 것처럼 ‘다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글이 쭉쭉 써내려 가진다.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다 뱉어버리니 속은 시원하다.
두 가지 선택 - ‘임신’이냐 ‘그림책’ 출산이냐- 은 각각 장점과 단점이 뚜렷했다.
그러나 완벽한 선택이란 없었다. 장점과 단점을 쓴 글을 수 십번 읽어도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다 . 이제 어쩔 수 없다. 마지막 남은 히든카드, 나를 잘 아는 당신에게 털어놓기로 한다.
3.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털어놓기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조언해줄 상대를 고른다. 감사하게도 바로 옆에 있다. 남편이다. 남편에게 팀장직 제안, 그림책 제작에 대한 이야기와 난임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는다. 가만히 들어주다가 남편은 묵직하게 한마디 던진다.
“효리야, 너 성취하고 싶은 거야. 임신은 미뤄도 괜찮아. 몇 개월 지연된다고 임신이 안되진 않을 거야. 그때 임신이 잘 안된다면 지금부터 시도하더라도 잘 안 되는 거고. 많이 미루는 게 아니니까 임신도 할 수 있어. 한 따까리 해봐.”
무엇이 내가 원하는 일인지 몰라 몇 시간을 고민하며 요가도 해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도 써봤는데 도통 어렵기만 했다. 근데 남편의 해답은 동전 넣고 버튼을 누르자마자 나오는 자판기처럼 쉽다. 다행이다. 남편에게 ‘나’는 명료하고 선명한 존재였다. 그 한 마디 덕분에 나의 Real Want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에게는 어려운 ‘내’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쉬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신박한 경험이었다.
결국 ‘해보기로’ 선택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처럼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라는 마인드로 그림책을 만드는 것도 그냥 일단 해보기로 했다. 앞날이 어찌 될지는 모른다.
그림책 제작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다음 달에 내가 임신을 하거나 계획 단계에서 엎어질 수도 있다. 뒷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팀장님께 ‘하겠다고’ 문자를 보내는 것, 그리고 좋은 꿈을 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