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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x Mar 03. 2021

남자 소머즈로 살아간다는 것

소머즈는 린제이 와그너, 원더우먼은 린다 카터

나는 귀가 잘 들린다.

식당이나 술집에서는 같은 테이블의 일행들이 궁금해하는 주변 테이블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곤 한다. 물론,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주변 인물들의 인상착의나 행동, 어투, 제스처 등을 면밀히 살펴보고, 화장실에 가며오며 또 다른 정보를 입수한 결과물이기도 하다.(이런 상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


그런 반면, 와이프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와이프가 장모님이나 처제들과 통화를 하면, 나는 온갖 소음을 줄이고, 그녀의 통화에 집중을 한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지만, 어투와 어조 혹은 와이프의 반응과 표정으로 통화 내용을 미루어 짐작한다. 그 내용을 근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면 와이프는 화들짝 놀라며 '이 인간이 어떻게 알았지?'라는 표정을 짓곤 한다.


귀가 잘 들려서 불편한 점도 있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도 남들보다 더 잘 들린다는 것이다. 화장실 옆칸에서 볼 일을 보는 사람의 신음소리(?), 헬스 기구를 들어 올리며 내는 소리,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내는 소리 등이다. 해서, 웬만하면 외출 시에는 화장실을 가지 않고, 설사 가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을 선호한다.


예전에는 싫어하는 사람의 종류가 세 가지였는데, 목소리 큰 사람, 욕하는 사람, 침 뱉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지금 되새겨보면 모두 소리와 관계된 것 같다는 느이다.


지금에야 마블의 히어로들이 뭉쳐 메머드급 빌런 타노스와 대항한다지만, 예전에는 거대한 자본력과 우수한 지능, 강력한 파워의 부하들을 거느린 악당을 대하는 선한 자들의 대표는 히어로가 아닌 그저 일반인이었다.


'권선징악'.

박치기왕 김일도, 당수의 달인 천규덕도, 알밤 까기의 여건부도 처음에는 악당역의 레슬러들에게 흠씬 당하고 심지어는 피까지 흘리다가 분기탱천하여 특유의 필살기로 적들을 물리치고는 했다.


그러던 중, 6백만 불의 사나이(*리 메이저스)가 나타나 강력한 힘과 축지법에 버금가는 스피드로 적을 제압하며 홀연히 강호의 정상에 우뚝 섰다. 6백만 불이 대체 얼마나 큰돈인지 셈조차 할 수 없는 가운데, 나를 비롯한 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은 그에게 환호했고,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6백만 불의 사나이에게 환호할 즈음, 미모의 여성 강자가 나타났다. 가녀린 몸매, 다소곳한 목소리, 그러나 그녀는 사고로 인해 다친 몸을 기계적 의학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고, 새로 태어난 그녀는 악의 무리를 응징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소머즈'(린제이 와그너).

*리 메이저스의 갈라진 턱은 마이클 더글라스의 부친인 커크 더글라스, 게리슨 유격대의 대장 게리슨과 궤를 같이 한다.


6백만 불의 사나이와 소머즈가 인간으로서 난관을 부딪힌 뒤, 시련과 고난을 거쳐 인간계의 영웅으로 거듭났다면, 얼마 후 나타난 외계행성의 공주 출신이자 전사인 '원더 우먼'(린다 카터)은 그들과는 출신 성분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는 6백만 불의 사나이도 원더 우먼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단연 '소머즈'였다. 웬만한 일에는 흥분하지 않고, 절제심을 잃지 않으며, 특유의 통찰력과 문제 해결 능력으로 온갖 악당들을 물리치는 그녀는, 당시 여자 중에 전 세계 최고의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우리 엄마에 버금가는 능력자였다.


'소머즈'의 최고 능력치는 청력이었는데,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땅 속 1미터 아래에서 굴을 파고 있는 개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의 능력치였다. 나는 6백만 불의 사나이가 가진 엄청난 힘과 스피드, 굉장히 먼 거리에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시력과, 원더우먼의 슈퍼 파워도 부러웠지만, 무엇보다 부러웠던 건 소머즈의 '청력'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슈퍼 파워나 스피드가 아닌 소머즈의 '청력'을 부러워했던 건, 소심한 철부지 소년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떤 갈등의 순간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의 의견은 어떤지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경험이 일천한 나이였기에 사람들의 표정이나 반응, 뉘앙스로는 짐작을 할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중요시했었던 것 같다.(커 보고 나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따라서, 귀를 기울여야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내 행동과 생각에 좋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셨던 박정덕 선생님께서는 다른 아이들이 다 떠들고 장난치는 순간에, 교실 맨 뒷 줄에 앉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던 나를 지켜보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 여러분들이 지금 집중하지 못하고 떠드는 순간에도 한 곳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는 친구가 단 한 명 있다."

교실은 정적이 흘렀고, 선생님은 칠판에 내 이름 석 자를 쓰셨다.


이제는 귀를 기울이는 것에 하도 집중을 해서인지, 노안과 함께 온 것인지, 가끔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잘 들린다. 어쩌면, 남들보다 잘 들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러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사방에서 이야기를 해도 되도록이면 다 경청하려는 편이다. 조금은 까다롭고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게 그들에 대한 내 관심이자 배려라고 생각한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듣지만,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늘 자기 이야기밖에 하지 못한다.

-달라이 라마


먹고 나면 막힌 귀가 뚫린다는 인천 모처의 육사시미 육회 세트.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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