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내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nx Feb 12. 2021

'야한' 영화의 진수

갈매기의 꿈...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동해안 청간정 주변의 바닷가. 겨울이건 여름이건 나는 동해 바다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경원중학교를 졸업했다. 입학할 때는 잠원중학교였는데, 학교 이름에 '잠'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잠실에 있는 학교로 오인된다고 하여 경원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버려서 입학은 잠원중학교로, 졸업은 경원중학교로 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웃긴 해프닝은 근처에 새로 생긴 이수중학교가 있었는데, 학교 교사를 짓지 못해 그 학교 아이들이 한 학기 동안 우리 학교에서 더부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그 웃지 못할 그 사건은 경원중학교와 이수중학교를 나온 아이들만 아는 사실일 텐데, 서로 다른 학교 소속이라는 건 알았지만, 텃세를 부린다거나 하여 서로 다투는 일은 없었다.

내가 중학교를 입학하던 때는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문교부 장관은 김동길 교수의 누나인 김옥길이었고, 우리 학교는 다음 해부터 실시하기로 했던 교복 자율화의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토요일이면 사복을 입고 등교를 했고, 이수중학교 아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 등교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7반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수학 선생님이었다. 늘 30cm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니면서 숙제를 해오지 않거나 떠드는 아이들의 뺨을 때리곤 했다. 내 기억으로는 대기업 회장이 할아버지였던 반장과 공부 좀 잘한다거나 동네에서 방귀 좀 뀐다는 집 아이들 말고는 거의 다 그 대나무 자에 뺨을 헌납하기 일쑤였다.

내 짝은 규호라는 아이였는데, 입학하던 날 규호의 어머니께서 짝인 나에게 자신의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규호는 눈이 많이 나쁘고 여린 아이여서 칠판 글씨를 잘 보지 못했고 그래서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를 하면 내가 공책에 쓴 것을 보고 옮겨 적는 경우가 많았고, 말수가 적고 착한 아이였다. 해서 규호의 어머니께서는 그런 자신의 아들이 걱정되어 짝인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았다.

규호 옆에는 규호와 같은 국민학교(당시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를 나온 L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지금의 신논현역 근처에 살던 애였는데, 어느 날 L의 생일 초대를 받아 규호와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이 그 애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집처럼 대문을 열고 계단으로 한 칸을 올라가면 잔디밭이 있었고 잔디에 물을 뿌리는 기계가 물을 뿌리고 있었으며, '기생충'의 가정부 '문광'의 말처럼 집의 내부는 밖보다 더 좋았던 게 기억난다.

그 당시, '태멘'이라는 출판사가 있었는데 성경 구절인 '태초에...아멘'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서 출판사 이름을 태멘이라고 지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L의 생일잔치가 끝나고 나서 L이 나에게 공짜 영화 표가 있는데 그 표는 태멘이라는 출판사에서 '갈매기의 꿈'이라는 책을 출간한 후, 이벤트로 제공한 것이고, 자신에게 그 표가 있으니 함께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는 굉장히 야한 영화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릴 적, 명절 즈음인가 세뱃돈을 받아 주머니가 두둑한 상태에서 엄마의 허락을 겨우 받고 태권 브이를 보거나, 엄마의 손을 잡고 누나와 벤허나 십계를 본 이후 극장엔 가본 적이 없던 터라 걱정이 앞섰는데,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였던 L은 의기양양하게 버스 노선 및 위치를 알려주며 당당하게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쳤다.

L의 당당함도 믿음이 가긴 했지만, 무엇보다 나의 관심을 끈 건 '야한' 영화였다. 중학생이 되어 이제 솜털 같은 콧수염이 날락 말락 하던 시절이었으니 성에 관한 관심은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L의 설명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야한 영화라니,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하여 L을 따라나선 길. 심약한 규호는 엄마와 약속이 있다고 가지 않았고, 성인으로의 첫걸음마를 떼려 작정한 나는 L의 뒤를 쫓으며 따라나섰다.

극장이 어디쯤이었더라.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아마도 종로 혹은 을지로 근방쯤으로 생각되는데, 그 후로도 그 극장에선 예술 영화만 상영했던 것 같다. 극장에 들어서니 극장은 규모가 작았고 관객도 손을 꼽을 만큼 적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른들은 거의 없었고, 여고생이나 여대생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저 누나들도 야한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그래, 저 누나들은 이제 한참 연애를 시작할 시기 아니던가. 그럼, 야한 영화를 봐야지, 암'. 나는 야릇한 상상을 하며 므흣한 미소를 짓고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알았지만, 그 유명한 닐 다이아몬드의 음악이 흐르고, 월미도에서 보았음직한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여기도 갈매기, 저기도 갈매기. 또다시 닐 다이아몬드의 음악. 또다시 갈매기, 갈매기...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저것은 엄청나게 야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메타포일 것이다. 처음부터 벗어젖히면 그게 무슨 예술인가. 그저 포르노일 뿐이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렇지만, 화면에는 처음보다 더 많은 갈매기들이, 월미도에서 본 것보다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우렁차게 끼룩 대기 시작했다. 무려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아,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아니, C발.

나의 첫 '야한' 에로 영화 탐방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규호도 L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다른 반이 되었고, 19반까지 있었던 학교였던지라 서로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전 영종도에서 무의도 가는 배를 탔을 때, 나를 향해 달려들던 갈매들을 보며, 규호와 L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리고 순수했던 시절의 나도 떠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펑크 난 타이어 교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