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먼 곳으로 가야 하는데
개찰구 삼각대를 허벅지로 밀어내자 관자놀이가 팽팽해졌음을 느꼈으므로 이것이 당면한 문제 일거니와
문제는 매일같이 아침에는 쾌활하고 넉넉하나 밤에는 음산하다는 것인데
이 증세가 먼 곳에서 나를 또다시 자빠뜨릴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지금으로선 ATM을 위해 결연히 2번 출구를 택해야 하겠지만 그 결연함이 떳떳하지는 못한 것이
흡사 망나니와 같은 소비 습관이 박살의 가능성으로써 우뚝 서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지만
예감을 짓누르는 생생함은 두 가지였으니 하나는 지상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평평한 발바닥에 가하는 강렬한 진동이요
또 하나는 나를 기습한 전도자인데
그녀의 눈이 참 크고 동그랗다는 것과 눈썹과 이마 주름이 있는 힘껏 위로 솟아있다는 것과 돌진하듯 다가와 저기요라고 했다는 사실
이것들 외에 이 지레짐작을 뒷받침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한 것을 8월의 습도만큼이나 텁텁하게 받아들이려던 찰나에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 이 모든 것은 빈약한 짐작들로 구축된 세계 아래에서나 유효한 시나리오일테다 -
그녀에게 나는 육지 위의 미아이며
나에게 그녀는 외딴섬에서 내륙을 응시하는 실향민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입장 차이를 황급한 목례로 갈음하고 서로 엇갈리자 이내 예수, 사기 공화국, 삶, 가장 기쁜 순간 같은 단어들이 혜성처럼 머릿속을 배회하기 시작할 무렵 이젠 ATM이 내게 돌진해 오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좌우를 살피고 비밀번호를 침착하게 입력하고 입금 된 액수를 두 번 확인한 기억이 송두리째, 그리고 적법하게 박탈당했으니
때를 놓치면 앞으로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 길 건너 아이스크림 집의 딸기 아이스크림이 나에게서 철저히 격리될 것이라는 소박한 불안이 박탈의 근거였으나
딸기 아이스크림은 또 다른 박탈을 불러왔으니
어지간히도 빌어먹을 습도가 전력을 다해 고체를 액체로 바꾸는 바람에
소파에서 축 늘어져 혀를 자유롭게 놀리려던 상상을 뭉개고
액체가 되기 전에 고체를 소멸시키는 것에 전력을 다하다보니
두 손엔 아무것도 없고 맛이 어땠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먼 곳에서 요구될 기지도, 전도자의 지난 삶도, 계좌 잔액의 십진법도.
2024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