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다시 출근한다. 휴직의 마지막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다가, 늘 그렇듯 딱히 한 게 없는 시간을 보냈다. 평일 낮의 여유를 최대한 즐기고 싶어서 공원 돗자리에 누워서 햇볕을 쬐었다. 그러면 그대로 스르륵 땅에 녹아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출근을 앞둔 기분이 어떠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 크게 괴롭지는 않다. 회사에 다니던 때에도 나는 월요병은 딱히 없었다. 회사가 싫다기보다는 한적하고 여유롭던 시간들이 끝난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쉬워서 이번 주 내내 약간은 울적한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다.
내 미래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공상들 사이에서 반년 뒤에, 1년 뒤에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지난 12주 동안 나에 대해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더 나 자신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적으로 부서를 이동해서 계속 이 회사를 다니길 바라는 건지, 실패해서 또 다른 길을 마주하길 바라는 건지도. 길리에서 바닷가에 누워 있을 때, 풍선처럼 크게 부풀었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한국에 돌아오자 금세 푸쉬식 바람이 빠져서 흐물해졌다. 이제 회사로 돌아가면 내 세상이 쪼그라들고 시야가 더욱더 좁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 세 달 동안 확실히 변한 게 있다면, 그전에는 퇴사가 무서웠는데 이제는 퇴사가 무섭지 않다. 사실 지난 시간 동안 나의 일상은 계획 없이 흘러가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모든 선택과 그로 인한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를 골랐을 때의 결과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선택은 그 자체로 최선이다. 테드창의 소설 <숨>에서는 미래는 정해져 있기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허무와 무력감에 빠지는 인물들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 딱히 아등바등하지 않더라도 어찌저찌 삶은 흘러가게 되어 있고 나는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오롯이 즐기면 되는 거다. 그래서 한 발짝 물러선 관조적인 태도로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다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 같다.
나의 지난 12주 회고를 돌아보았다. 매 회고에 당찬 포부와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 글들을 보는데 뭐랄까, 굉장히 애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게 여유를 즐겼다고 여겼던 지난 12주 내내 사실 나는 치열하게 희망찬 미래를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인사이드아웃>의 조이코패스와 다를 바 없었던 셈이다. 돗자리에 누워 있으니 그런 생각들조차 아득하게 느껴졌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아도, 즐겁지 않아도 괜찮아. 힘내라고 응원하지 않겠다. 그냥 내 모든 감정과 경험에 경중을 따지지 말고 풍부하게 느끼고 기록하자.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소설을 읽듯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사는 게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