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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이 Nov 26. 2024

고통스러워도 놓지 않는 사랑, 그 숭고함에 대하여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241124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독서모임 후기




이번 정모 도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혼자 읽기에는 다소 난해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대체 한강 작가는 왜 다른 작품들보다 이 책을 먼저 읽기를 권한 걸까, 들었는데요. 독서모임을 통해서 더욱 이해와 감상이 깊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같이 얘기 나눠보지 못한 분들이나 훗날 다시 이 책을 읽게 될 저 자신을 위해서 후기 기록해보려 합니다.




이 책은 사실 처음 읽으면서는 취향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문장은 어떻게 이렇게 예리하게 표현했을까 싶을 정도로 감각적이었지만 너무 많아서 지치게 되었고,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사명을 가지고 무리하게 행동하는 인물들은 이해할 수도, 몰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꿈으로 시작해서 생사마저 불분명해지는 몽환적인 배경설정은 더욱 현시점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점차 느낀 건, 그 모든 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현재보다는 옛날 사건 위주다 보니, 시공간은 물론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희미해진 주인공 경하의 시점을 좇으며 함께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분위기와 설정 때문에 한동안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는 잔상들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무거운 내용을 다루면서도 가벼운 새와 눈의 이미지 때문에 포근하게 느껴지는 그 분위기에 파묻힌 기분이에요. 다시 한번, 소설이란 은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잘 쓰인 소설이란 ‘사랑’이란 단어 없이 ‘사랑’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바로 이 책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경하도 인선도 아닌,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라고 느꼈는데요. 정심은 현재 시점에서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주인공 경하에게는 단지 작고 마른 노인으로, 인선에게는 치매에 걸려서 오락가락하는 애증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모호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 정심의 전생애를 보면서 저에게 정심은 강하고 선명하고 생기 있는 인물로 와닿았습니다.


작 중에서 가장 처절하게 느껴졌던 부분도 바로 어린 정심이 죽어가는 막내 여동생에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며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표현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치매로 정신이 희미해져서도 자고 있는 딸 인선의 입에 손가락을 넣곤 하던 심정이 어떨지 저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오빠의 흔적을 좇다가 오빠가 송치된 날을 기일로 하자고 ‘작별’하는 심정은 또한 어땠을까요. 그럼에도 차마 작별하지 못하고 남은 생애를 유족회 일원으로 자료를 모으며 보냈던 그 사랑이 숭고하고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독서모임에서 다른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고서야 무리하게 느껴졌던 설정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인선이 왜 작은 새의 생명을 포기하지 못하고 경하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는지, 인선은 왜 손가락을 잘릴 때까지 나무들을 모아 작품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는지, 3초에 한 번씩 상처가 아물지 않게 찌르는 것을 왜 포기해서는 안되는지, 경하는 왜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인선의 부탁을 끝까지 수행하는지. 그 설정들을 통해 작가는 가족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당시 유족들의 사랑을, 발이 돌이 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애절한 사랑을 담아내고자 한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생사가 불분명한 새를 구하러 가던 1부의 경하와, 생사가 불분명한 오빠를 찾으러 가던 2부의 정심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리고 악몽을 꾸면서도 아픈 과거의 기억들을 계속해서 들추어내는 작가 본인의 사랑도요.


작가는 등장인물 경하의 입을 빌려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플 것에 대한 각오를 드러냅니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작별’이란 이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얘기하는 사랑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통이 끝이 없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잊지 않고 직면하는 게 사랑의 숭고함임을, 그 사랑의 힘으로 독자들이 다른 작품들도 읽어내기를 작가는 바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책 중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기를 권한 게 아닐까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던 것도 책에 담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일 텐데, 이런 작품을 계속해서 써내는 한강 작가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별하지 않을’ 의지를 드러내는 작가를 통해 숭고한 먹먹함이 깊게 와닿는 책이었습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각오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것도 종결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사랑이든 애도든 끝내지 않고 끝까지 끌어안고 가겠다는 결의라고 생각했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그 외 인상 깊은 대화들]


Q. 인선과 경하 중에 누군가가 죽었을까? 죽었다면 누가 죽었을까?


- 경하가 인선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병원에서 다급하게 간호사가 끊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인선이가 죽었을 것.


- 죽은 인선이 유령이 되어서 찾아왔다는 것보다, 경하가 생사가 오락가락해서 새가 다시 부활하는 등 환상을 본다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 인선에게 전화를 거는 경하의 휴대폰 배터리 10%가 인선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상징


- 둘 다 죽지 않았고, 둘 다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 둘의 영혼이 만난 게 아닐까?


- 사실 누가 죽고 안 죽고는 이 작품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냥 좀 더 몰입할 수 있는 장치로 모호하게 처리한 것 같음.


Q.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데 돌아보았다가 돌이 된 사람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


- 돌이 될 것을 알면서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사랑을 표현.


- 결국 아플 것을 알지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주제의식을 한 번 더 보여주는 것.


Q. 왜 하필 다른 동물도 아니라 앵무새를 주된 소재로 사용했을까?


- 새의 가벼움, 연약한 생명, 부활의 이미지를 차용


- 새의 뼈에는 구멍이 있어서 뼈가 가볍다고 한다. 희생자들이 뒤늦게 가벼운 뼈로 발견되는 것을 의미.


- 어쩌면 모든 희생자들이 총살을 당했으므로, 뼈의 구멍이 그것을 의미할 수도. 새가 두 마리라서 묻어 주고, 또다시 땅을 파서 묻는 과정에서 이미 묻힌 곳을 파헤치는 것도 희생자들을 의미할 수도.


- 말을 따라 할 수 있는 존재.


Q. 왜 경하는 꿈에서 본 나무의 영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포기했고, 인선이는 그 나무들의 크기를 더 키워서 준비했을까?


- 경하는 4.3 사건의 실질적인 피해자가 아니기에 포기했으나, 인선이는 희생자들과 직접적인 연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더 크기를 키운 게 아닐까.


- 경하는 5.18과 관련하여 꿈을 꿨으나, 사실 이 땅에 잊지 않아야 할 희생자들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포기. 5.18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


- 5.18의 경우 예전부터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4.3은 완전히 묻혀 있다가 최근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등 더욱 다뤄야 할 게 많음.


- 규모와 희생자들의 수, 희생자들의 연령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소년이 온다>는 3년 전 저의 독서모임 첫 정모 책이었는데요, 그 책을 읽으면서도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문학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가 포착한 것들이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러서는 앞으로도 계속 작별하지 않을 의지를 다지며 단단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입니다.


대체로 소설은 주인공에게 역경과 사건이 들이닥치고, 그 여정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의 고통을 나누게 되는데요. 그렇게 형성된 공감과 연대가 작품 속 뿐 아니라 우리 세상으로 확장되도록 하는 것이 문학의 의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상적인 문학 작품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통스러웠던 만큼, 우리 모두 앞으로도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책이 어렵고 난해했더라도, 4.3 사태를 통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것만으로도 작별하지 않는 것에 한걸음 다가가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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