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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JE 마이제 May 05. 2024

어쩌다 간호사

01. IMF, 꿈보다 취업률

1997년, 뉴스를 보는 부모님의 시선이 불안해 보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내 재계순위 30위권 안에 들었던 대기업들이 부도처리 되었다.

친구의 아빠들이 실업자가 되는 일이 흔했고, 심지어 지살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며 한국의 경제성장신화 축제를 접고, 사실상 국가 부도를 인정했다.


그 추운 겨울을 보내고 1998년,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리는 '꿈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어른을 만나지 못했다. 

그저, '취업 잘 되는 곳'이 최고인 것으로 교육받았고,

언제 망할지 모르는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어른들은 '큰일 날 소리'라고 대응했다. 

맞다.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공무원이었다. 

"철밥통이 최고여!" 나는 그렇게 배웠고, 고1 장래희망에도 '공무원'을 적어냈다. 


하지만 나는 천성이 ENFP로,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틀에 박힌 것을 지루해한다. 

애초에 '공무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부모님이 적으라고 해서 적었다. 


취업, 사회, 정치보다 하늘의 별이나 학교 옆 상가 건물의 특이한 구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같은 동네라고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던 남학생들과 친했고, 연애도 했다.

밴드부 남학생의 일렉기타를 동경했고, 그 녀석을 따라 헤비메탈이 귀를 찢는 락카페도 다녔다. 

뭔가 항상 화가 나 보였던 그 녀석의 반항적인 모습이 뭔가 멋있어 보였다. 

왜 화가 나있는지는 몰랐다. 그 녀석이 듣던 메탈리카 같은 헤비메탈 가수들도 늘 화가 나있었다. 

그 녀석에게 록음악을 배우고, 그 당시 처음 생긴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배웠다. 


하지만 대게는 친구들과 H.O.T나 젝스키스 음악을 듣거나, S.E.S나 핑클 춤을 따라 추고, PUMP를 열심히 하는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내내 줄곧 반장을 했다. 

성적도 꽤 괜찮았다.

순간순간 열심히 살았지만, 나는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고,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성적이 적당히 나오면 부모님도 선생님도 나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분히 '편하게 간섭받지 않고 놀기 위해' 공부를 하는 정도였다.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시도 때도 없이 학교 담을 넘어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만족할 만큼은 했다. 

그렇지만 '꿈'은 없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하지만 매 순간 열심히 살았다. 


고1의 나에게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간에)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 좋았으면서, 왜 '재미있는 삶'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을까.


IMF때 실업자가 된 주변의 어른들을 보며 나는 바로 현실에 굴복하고 순응했다. 


나는 사실 새로운 건물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기에 '건축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고, 예술과 달리 실용적이기까지 하니 내 기준에서 건물은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다.

하지만 IMF때 건설업은 가장 힘든 분야였다. 

건설회사들이 줄도산하던 때였다.


도시개발공사에서 근무하시던 아빠는 안 그래도 요즘 경제가 힘든데, 철야근무를 할 수 있는 남자직원을 고용하지.. 철야근무도 못해, 육아휴직해, 인부들과 갈등이 있을 때 의견 조정이 잘 안 되는 여자 건축사를 누가 뽑아 쓰겠냐고 하셨다. 경력도 많고 실력도 좋은 남자 건축사들이 회사가 망해 지천에 널렸는데, 여자 건축사는 당분간 자리가 없을 거라고 하셨다. 


25년 전이니 그때는 정말 그랬다. 여자들의 유리천장이 선명하게 존재했다. 납득이 되는 말이었다. 

그래도 건축학과를 가겠다고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


대학원서접수 마지막날, 엄마가 간호학과에 원서를 접수했다. 

이유는 단 하나, 취업률이 좋아서.

교대나 간호학과, 기계공학과 등 취업률이 좋은 학과들의 커트라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한 때가 이 때다.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직업이었다. 

건강해서 병원도 안 다녔기에, 간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주사.. 놓는 거?!


아니, 간호사가 주사 놓는 것 말고 뭘 하길래... 4년씩이나 공부를 하라는 거야, 엄마?

그래도 나름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는데, '간호사'를 하라고? 


그 정도의 무지함으로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주사 놓는 것만 배워 나오면 되는 줄 알았던 간호학과 공부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빡쎘다. 

고3때와 똑같이 0교시부터 수업을 시작해 7교시에 수업이 끝났다. 


내 인생의 목표를 찾고, 인생을 설계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라고 주어진 청춘의 시간은 또 그렇게 그냥 흘러갔다.


고등학생때와 똑같이,

주어진 공부를 하느라, 또 연애를 하느라 

어른다운 고민도 사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열심히 살았다. 



(To Be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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