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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on de Madame Saw May 07. 2022

호주 농장 지옥에서 얻은 귀한 인연.

<내가 만난 사람들> 번다버그 의자왕을 소개합니다.

내가 삼 년 가까이 살았던 호주는 인구가 적고 땅덩어리는 커서 일손이 매우 부족한 국가로 일 년짜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들어가 삼 개월 정도 일손이 부족한 지역, 직종에서 근무하고 고용주가 인증하는 세컨드 비자 폼을 받아 이민성에 제출하면 일 년을  체류할  있는 세컨드 비자를 발급받을  있었다. 내가 워킹홀리데이 워커였던 5 전까지만 해도 워킹 비자 신청 대상이  30세까지였으나 요즘은 35세로 늘어났고 일 년을  체류할  있는 써드 비자까지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호주의 농장은  세컨드 비자 폼을 받기 위해 워홀러들이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곳이었다고   있다. 덕분에  약점을 이용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업주들이 아주 많았으며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된다. 때문에 하루는커녕 한 시간도  일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되도록이면 빨리 비자를 받아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군대를  발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드물게나마 존재하듯 가끔 어떤 이유에서 일이 적성이 맞거나 경험을 중요시하거나 소위 말하는 ‘똘끼라는 것이 있어서  2년의 체류기간 내내 농장 워커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음악전공자로 육체노동이란  해본 적이 없기에 그런 현장 노동이라는 것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귀국   하고 있는 물류센터 상하차나 배송 보조 따위는 일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굉장히 고된 노동이었지만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분야에서 의외오 두각을 나타내는  자신을 보고 자신감을 얻어 나름의 짜릿함을 느꼈던  같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오기 전 호주 퀸즐랜드주의 브리즈번에서 일 년간 어학연수를 했었는데 그때 일본인 셰어하우스에서 일본인들과 주로 생활을 했었기에 그게 익숙해져서인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바베라로 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한국인 농장에서 조차 거의 일본인들과 어울렸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인 남자 친구가 있었기에 더더욱 한국인들끼리 무리 지어서 놀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방금 말한 한국인 농장을 제외하면 내가 근무하고 머물렀던 모든 호스텔, 농장에 거의 외국인들 뿐이었고 한국인은커녕 아시안이 나 혼자였던 적도 있는데 낯을 가리고 내향적이며 백인 문화에 적대적인 성향 탓에 거의 혼자 생활했기에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이 사무친다는 게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꼈었다.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근무했던 ‘호주 농장의 해병대’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악명 높은 번다버그라는 지역의, 속된 말로 힘들기로는 원탑급인 바베라라는 농장에서 다행히도 한국인 동료들끼리 퍼마시는 술의 묘미를 찾았다. 새벽까지 미친 듯이 마시고 몇 시간 후 밭대기로 출근해 다시는 술 안 마신다며 울면서 일하고는 돌아오자마자 “야.” “댄 머피(바틀 샵) 갈 준비해.” 라며 또 퍼마시고 또 출근하고 울먹거리는 하루하루의 반복. 스스로가 한심하면서 이상하게 기특하기도 한 것이 묘하게 재미있고 동질감이 느껴져서 끊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에겐 음주가무만큼은 세계 최고여야만 한다는 이상한 단군의 후예로서의(?) 사명감 같은 게 세포에 뿌리 박혀있는 것 같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진정 적절한지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 같다.)




덕후는 앞서 말한 바베라 팜의 워커들이 거주하던 빅풋이라는 워킹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다. 그것도 무려 다른 농장으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케이스였는데 이유가 잠시 쉬려고였다는 게 가관이라 그곳에서 몇 년을 일한 슈퍼바이저 오빠마저 “누가 번다버그에 쉬러 와....?” 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지금 보면 바베라를 떠나 당도한 바나나 농장도 힘들기로는 유명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원래 요리를 하던 친구여서 음식을 아주 기가 막히게 했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 친구가 밥을 하면 세상 너무 맛있어서 상을 차려놓으면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 조용한 일본인들 마저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들고 모여들 정도. 덕후는 마음이 넓어서 그런 경우 다 같이 먹자며 나눠줬기에 저녁마다 파티 아닌 파티가 벌어지곤 했다. 말이 많고 가볍지 않고 아니라 과묵하고 진득한 성격이었는데 사교성이 은근히 좋아서 늘 주위에 여자아이들이 몰려있었기에 한국인 친구들이 ‘번다버그 의자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었다. 자다가 화장실 가려고 나와보면 맨날 세계 각국의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 맛있는 음식이랑 술을 마시고 있는데 여색을 밝히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 같은 타입이 아니라 그게 매우 신기하고 웃겼다. (같이 일하던 동생은 역시 덕후형이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추억이 있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썰을 풀 땐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항상 덕후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항상 메인 주제였던 것 같다.


그때 함께 어울렸던 한국인 친구들과 귀국 후에도 쭉 연락하며 지내고 싶었지만 각자 일이 바쁘거나 연락처가 바뀌어 결국 아직 한국에서 다시 만난 건 우리 둘뿐이다. 덕후가 제주도 출신이라 내가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만났었는데 이번엔 덕후가 역시 요리왕 답게 청담의 한 유명 오마카세 레스토랑에 취직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어 삼 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역시나 그때처럼 아주 즐거웠고 이번에 다시 한번 느꼈지만 이 녀석은 참으로 진실되고 품위가 있는 좋은 친구다. 바베라에서의 추억이 완전히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만든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 값진 겸험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다. 언제나 꽃길만 걷길 바라.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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