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며칠 전, 창 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아늑한 가을밤이었다. 일과를 끝내고 개운하게 샤워를 한 뒤, 좋아하는 강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 담배냄새였다. 여름 내내 베란다에서만 간간이 맡을 수 있던 그 기분 나쁜 냄새가 그 날 따라 내 좁은 방을 가득 메운 것이다. 나는 짜증이 났고 예전처럼 베란다에 나가 크게 소리를 치려고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알게 된 입주민 단톡방이 떠올라, 의미 없는 아우성 대신 300명이 넘게 모인 그곳에다 짧은 호소글을 남겼다.
0000동 0000호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제 방에는 제가 피지도 않는 담배 냄새가 가득합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실외흡연을 해주세요.
뚜렷한 개선을 기대했다기보다 답답함을 못 이긴 하소연에 가까웠던 이 네 마디의 파장은 내 예상보다 훨씬 컸다. 그때까지 평화롭던 채팅방에 층간 흡연을 성토하는 글이 우후죽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각종 피해 사례와 민원이 빗발쳤고 구체적인 동과 호수까지 거론하며 대상을 콕 찍어 저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얼마 후 채팅방 관리자가 새로운 채팅방 주소와 함께 이런 글을 남겼다.
불평불만방(이하 불평방) 개설했습니다.
이제 이 이후로 이 방에서 흡연 층간 소음 쓰레기(분리수거) 등 대화는 금지입니다. (중략)
그간 사람들의 대화를 간간이 지켜보며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나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사태에 불씨를 댕겼으니 당연히 그 방에 들어가야 할 책임도 생긴 것이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것, 답답한 사람들끼리 모여 궁여지책이라도 하나 만들자 싶었다. 그런데 웬걸, 방금 전 빗발치던 성토와 달리 불평방에는 자정이 지나기까지 고작 열 명 남짓한 인원만 모였다. 들어왔다가도 사람들은 뭐가 꺼림칙했는지 금세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다음날 난, 불평방에서 층간흡연을 가장 강하게 성토하던 옆 동 주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입주 직후부터 아래층 주민의 흡연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동안 관리사무소를 통해 경고하고, 인정에도 호소해봤지만 도저히 개선되지 않아 고소까지 생각 중이라고 했다. 나는 평화로운 해결을 당부하면서, 작은 도움이 될까 싶어 담배 냄새를 줄여주는 방분탄에 관한 영상을 공유했다. 그리고는 채팅방을 개설한 관리자에게 이러한 작은 정보들을 모아 공지에 올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남겼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해결방안이 정해지면 그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뚜렷한 해결방안이란 없으니 서로를 위한 강구책이라도 공유하기 위함이라 하자 그의 반응은
네. 강구책을 만들어주세요.
그에게서 무성의함을 느낀 나는, 그동안 틈틈이 생각하고 모아 왔던 층간 흡연과 층간 소음에 대한 대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달라는 강구책을 금방이라도 눈 앞에 들이밀어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불평방을 따로 만든 것도 분명 다른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이유에 대해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불평을 말하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불편해한다는 것이었다. 입주민 선관위라는 그의 직책에서 나온 것치고는 형편없는 대답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본인도 답답했는지 그간에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평과 불만만 난무할 뿐 그 무엇도 해결된 것이 없다.”였다. 층간 소음, 층간 흡연, 반려동물 분변, 오토바이 주정차 등등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민원들이 채팅방에 쏟아졌다. 그러나 매번 감정만 앞세우고 다투기만 할 뿐 실질적인 해결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되려 저조한 투표율 때문에 아직도 동대표를 뽑지 못한 곳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자 다른 평범한 입주민들까지 채팅방을 떠났다. 그래서 그를 포함해 문제 해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어느새 의욕을 잃었고, 이제는 한시라도 빨리 이사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허울뿐인 직책도, 귀찮은 채팅방 관리도 얼른 다른 이가 맡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의 입장도 일견 이해가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이른바 ‘행복주택’이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행복주택’
대학생,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등이 주로 거주하는 이 공공 임대 아파트 단지는 최장 거주기간이 6년에서 10년이다. 이후로는 분양을 받을 수도 없고 무조건 퇴거를 해야 하기에 영원한 내 집이 될 수 없는 곳이다. 거기다 저가형 자재들로 지은 임대 아파트다 보니 문제점은 끊임없이 생겨났다. 심각한 층간 소음과 무용지물인 출입구 도어록, 곳곳에서 발생하는 생활 하자까지. 그러니 3개월도 못 버티고 다시 떠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바라는 것이 오히려 무리한 요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 결함 투성이 아파트가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스물일곱, 서울살이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무일푼이었다. 그래서 나는 월세와 관리비를 공동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보증금 없이 남의 집 방 한 칸을 겨우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선뜻 방을 내어준 인간은 도박 빚만 수천만 원을 지고 있던 다단계 회사 직원이었다. 그가 나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명확했다. 나는 매일 밤마다 호랑이 문신이 새겨진 그의 등에 물파스를 발라주며 끈질긴 다단계 가입 요구를 거절해야 했다. 얼른 보증금을 모아서 어떻게든 월세방부터 출발하려 했던 내 계획은 생각처럼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나는 결국 그렇게도 싫었던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 월 15만 원 쪽방에서 매너는 사치고 양심마저 없는 뜨내기들과 전쟁 같은 6년을 보내고서야 겨우 지하 월세방을 구할 수 있었다. 한 줌의 햇빛도 허용되지 못한 그곳에서 2년을, 시끌벅적한 대림동에서 다시 3년을 더 보낸 뒤 나이 마흔에 겨우 이 성냥갑 아파트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문제점 투성이겠지만, 내게는 다단계를 강요하는 룸메이트도 없고, 공동욕실에다 똥을 싸거나 남의 반찬을 훔쳐먹는 인간도 없으며, 빨래를 햇빛에 말릴 수 있는 베란다가 있는 이 곳은 천국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나 역시 층간 소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대림동 원룸 건물 지하 노래방에서 새벽마다 들려오던 노랫소리에 비하면 이 정도 소음은 ASMR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웬수같은 담배냄새만 잡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생활이었다.
채팅방 방장은 대화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앞장서서
세게 일을 내면 좋겠지만...
그런 분도 안 계시네요
못마땅했던 그의 무성의가 실은 납득 가능한 무기력이었음을 깨달은 뒤 그의 저 마지막 말에 나는 왠지 모를 욕망의 꿈틀거림을 느꼈다. 불현듯 내가 사랑하는 이 아파트 단지를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때마침 시간도 많은 백수니까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일 것 같기도 했다. 이제껏 나의 안위만 챙겨 왔으나 앞으로는 이 동네의 홍반장이 되어보는 것도 인생에 중요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때까지 정리하던 층간 흡연, 층간 소음 대책을 들고 손을 번쩍 들며 이렇게 외칠 준비가 되었다.
그 일! 제가 해보겠소이다!
그러나 나는 외치지 않았다. 손을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쓰던 글을 삭제하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문득 아주 오래 전의 기억, 아니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래전 MBC 일요일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일밤(일요일 일요일밤엔)'에는 TV인생극장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지금은 비호감의 아이콘으로 전락한 이휘재 씨지만, 당시 갓 데뷔한 신인인 그를 최고의 개그맨으로 떡상시켜준 코너가 바로 이 TV인생극장이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둔 그(혹은 여주인공)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데, 이를테면 전재산인 500원을 가지고 복권을 살 것인지, 차비 없는 할머니를 도와줄 것인지, 그가 내린 결정에 따라 첨예하게 달라지는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릴 적 이 프로그램을 손꼽아 기다렸던 나 역시 40년 인생 동안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하며 살아왔다. 비록 저 콩트 속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결말 따위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내 인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허무한 상상을 할 때마다 언제나 스물여섯 살에 그 여름밤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다.
스물다섯에 가을은 내게 참으로 잔혹했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고,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연인과도 헤어졌다. 악착같이 모았던 돈도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나는 빈털터리에 자격증 하나 없는 인문계 고졸 백수로 전락했다. 그런 내게 친구 C가 다가와 대학입시를 권유했다. 사람 좋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C는 학창 시절엔 그저 놀기 좋아하는 농땡이였으나 군대를 제대한 후 교대 입학을 목표로 몇 년간 열심히 공부 해왔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바라던 학교는 아니었으나 공립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것이다. 이미 자신이 이룩한 선례를 보여준 녀석의 격려에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결심을 굳혔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던 가족들도 마침내 지원을 약속했다.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있던 C는 자신이 다녔던 학원 선생님께 부탁해 나를 종일반 반장으로 만들었고 그 덕에 학원비를 일부 감면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스물여섯에 재수생이 되었고, 날 위해 온전히 희생을 선택한 가족과 자기 일처럼 나서서 챙겨준 친구에게 보답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반년 후, 6월 모의수능평가에서 목표한 대학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을 받았다. 이 페이스만 유지하면서 운만 조금 따라준다면 서울에 중상위권 대학도 노려볼만했다. 그런 내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3박 4일 동원훈련을 다녀온 다음날이었다. 스무 살 재수생 아이들 몇몇이 다가와 면담을 요청했고 나는 그저 '공부 안된다', '누가 너무 떠든다'식에 하소연이겠거니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갔다. 그러나 옥상에서 그들이 토로한 것은 다름 아닌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당시 우리는 이른바 종일반 소속 학생들이었다. 원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원하는 요일, 시간에 선택해 듣는 단과반이 아니라 한 달에 수십 만원씩 내고 고3 수험생처럼 종일 시간표에 맞춰서 해당 과목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는 반이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선생님의 수업방식이 나와 맞지 않아도 그 수업을 피할 방법은 없었고 차츰 쌓이던 불만이 이제야 터지고만 것이다. 그들은 인생이 걸린 시험을 피 같은 돈과 시간을 바쳐서 준비하는데 몇몇 선생님들은 수험생을 가르칠 자질이나 의욕이 없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그러나 반장인 나로서는 정말이지 난감한 요구일 수밖에 없었다. 수능이 4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무리 학원이라지만 나 역시 일개 학생일 뿐이었고, 심지어 그들이 지목한 선생님 중에는 날 반장으로 뽑아준 담임 선생님도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불만을 품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훈련을 다녀온 동안 몇 사람이 주도해 반 학생들 다수의 찬동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중에는 전해에 고려대 법대를 합격하고도 오직 서울대를 가기 위해 학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니던 전교 1등 녀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혼란스러웠던 나는 일단은 지켜보자며 그들을 돌려세웠고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다시 책을 잡았다.
‘어차피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다.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거다.’
‘이제와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내가 학원 이사장 아들이라도 되는 줄 아나.’
마음속으로 온갖 비겁한 생각들이 차올랐지만, 나는 합리화와 자기 위무로 꿋꿋이 버텨냈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들의 요구는 계속되었고, 학원비 한 푼이 아쉬운 나는 당장 반장을 그만둘 수도 없어 점점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나를 포함해 학생들이 가장 믿고 따르던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수학을 가르치는 분답게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던 그는 분명 공부나 하라는 따끔한 충고를 할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이 그렇게도 간절히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럴 줄 알았다.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다.
그랬다. 선생님들도 사람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꼬박 보는 아이들의 차가운 눈빛과 냉담한 분위기를 읽어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들은 꽤 오래전부터 학생들의 불만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자기들끼리 퇴근 후 수시로 모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들이 내린 결론이 바로 수학선생님이었다. 타 지역 출신이면서 학생들에게 신뢰를 넘어 추앙까지 받던 그가 수업시간마다 다른 선생님들의 험담을 했고 그래서 아이들이 저렇게 불순하게 물들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던 수학선생님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미 왕따가 된 것은 오래전 일이고 이번 일로 학원에서 쫓겨나기 일보직전이었다. 내가 학원을 다니는 이유의 팔 할을 차지하고 있던 그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수학선생님에게도 그곳은 일터이자 생계가 걸린 자리였고 또한 전쟁터였다.
기다려봐.
나도 준비하는 게 있다.
그는 순순히 물러날 마음이 없었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지리 선생님 같은 타지역 출신 선생님들을 규합해 분위기를 반전시킬 계획이었다. 이른바 선생님들끼리의 알력 다툼도 이미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거대한 혼돈 앞에서 어떤 자리에 서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당장 내게 중요한 것은 대학 입시지 학원 내 쿠데타가 아니었다. 그걸 바꾼다 한들 내게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수학선생님과 지리 선생님이 떠난다면 내가 이 학원에 다닐 이유 또한 사라지는 것이었다. 원생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지고, 그저 피하고 싶은 두 가지 선택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학생들과 소수파 선생님 편에 설 것인가?
다수파 선생님 편에 설 것인가?
당시 불만의 대상 중 한 사람이었던 담임선생님은 어느 날 밤 학생들을 한 사람씩 교무실로 불러 이른바 '진로 상담'을 시작했다. 금방 내 차례가 왔고,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와 마주 앉았다.
뭐랄까. 그것은 결코 진로 상담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목표하는 대학이나 과를 묻지도 않았고, 취약한 과목에 대한 해결 방안을 논의하지도 않았다. 요즘 내 컨디션이나 앞으로의 공부 계획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응. 잘하고 있어. 그려.
이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따름이었다. 입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만 짓는데 눈으로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영화 살인의 추억 속에 박두만 형사(송강호 역)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범인을 잡아내듯, 그 역시 지금 자기 앞에 앉은 이 녀석의 눈빛을 바라보며 내 편인지 아닌지를 찾아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오히려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교실에 돌아왔다. 내게 쏠린 학생들의 눈빛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부담감이 느껴졌다. 쉬는 시간이 되자 그들은 내 주위로 몰려들어 다시 한번 앞장서줄 것을 촉구했다. 나는 녀석들의 빗발치는 요구를 묵묵히 감내하고만 있었다. 그 시간이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담임선생님과 방금 상담을 마친 한 여학생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고는 오열을 시작했다.
저게 무슨 상담이에요!
내가 왜 돈 내고 시간 내서
저런 상담을 받아야 해요!
그러자 몇몇 아이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그들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우던 그 순간 나는 내내 미루었던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후의 스토리는 다소 맥 빠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선생님들 간에 알력 다툼이 절정으로 치닫자 학원에서는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 사항을 서면으로 접수했고, 그것으로 피아를 식별한 다수파 선생님들은 불만을 주도한 종일반에 몇몇 학생들을 다른 반으로 이동시켰다. 그중에는 반장자리를 박탈당한 나도 있었다. 종종 아무런 이유 없이 본보기로 당해야 했던 모욕과 체벌은 감수하고서라도 한번 흐트러진 페이스를 다시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미 어디까지 올라간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붕 떠버린 마음은 끝내 잡지 못했고 지독한 슬럼프까지 겹쳐 시험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나는 말없이 학원을 떠났다. 그리고 학원은 그 해 수능이 끝난 후 다수파 선생들을 전부 물갈이했고, 소수파였던 선생님들과 그의 동료들로 학원을 채웠다. 결국 내가 선택한 이들이 승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재수생이었던 나는 엉뚱한 것에 힘과 시간을 쏟아부은 대가로 수능을 망쳤으며 지원했던 모든 대학에서 고배를 마셨다. 1년 동안 묵묵히 지원해준 가족들과 틈 날 때마다 날 찾아와 격려하던 친구를 볼 면목이 없어, 그 해 겨울이 가기 전 경기도 화성에 있는 LCD 공장에 부랴부랴 취업했다.
살아오며 지금껏 내가 했던 모든 선택들을 되짚어보면 때로는 어리석었거나 혹은 현명했고 때로는 비겁했거나 혹은 떳떳했지만 결국 그 무엇도 남이 시켜 억지로 내린 선택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결과를 놓고 봤을 때 결코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 있었으나, 다시 시간을 되돌린대도 나는 또 같은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그 당시의 가장 나다운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 해 그 여름밤, 학원 복도에서 했던 선택도 그래서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가끔 인생에서 마주한 여러 갈림길을 떠올릴 때마다 그 여름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당시 내게 선택지는 오로지 두 가지밖에 없다 믿었던 그 어리석음에 대한 회한 때문은 아닐는지. 만약 지금의 내가 그 날에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나에게 이렇게 충고를 해 줄 것이다.
“반장을 그만둬. 바보야.”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학원비를 더 내더라도 반장을 그만뒀어야 했다. 손가락질이나 냉대 좀 받더라도 남은 기간 입 닫고 그저 내 공부에만 몰두했어야 했다. 남의 아픔을 외면하고, 나 혼자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랬어야 했다고 믿는다. 그때 선택으로 내가 날린 것은 단지 나의 시간과 노력만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일 년 동안 내게 쏟아부은 돈, 친구의 많은 배려와 도움, 내 주위 여러 사람의 희생도 결국 내 선택으로 빛이 바래지고 말았다. 그 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번 층간흡연 문제를 겪으면서 나는 잠시나마 내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스물여섯의 청년이 아니라 마흔 살에 중년일 뿐이었다. 스물여섯 때도 바꾸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 바꾸려고 했다니...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어 코웃음이 났다. 거기다 지금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내년에 있을 자격증 공부도 한참 열중해서 잘하고 있다. 그런데 또 엉뚱한 일에 힘을 쏟아서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 실패는 젊은 날에 한 번으로 족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나는 결국 층간흡연을 참고 살기로 했다. 침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겁한 선택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쩌겠는가. 내가 고작 이 정도의 어른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