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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담 Jul 30. 2020

페미니즘 번역, 자연스러움을 되묻는 불편한 용기

<코르셋: 아름다움과 여성혐오> 옮긴이의 말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은 ‘자연스러움’을 의심하는 과정이었다. 지금껏 번역을 배우면서, 타인의 번역을 말하면서, 내 번역을 고치면서 ‘자연스러움’만큼 당연한 기준도 없었다. “이 문장은 좀 자연스럽지가 않은데?” “이렇게 하면 부자연스러워.” 같은 말을 이상하다는 생각도 없이 했다. 그리고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은 한국에서 자라 한국어를 사용하는 저자가 직접 쓴 글처럼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번역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기준이 산산조각 났다. “ 뒤에 숨겨진, 추악한 본모습”이라는 뜻으로 ‘민낯’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부끄럽고 분하지만 그런 용법으로 이 단어를 썼던 게 처음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다른 번역 작업을 하면서 함축적이고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여러 번 그런 뜻으로 ‘민낯’을 들먹였던 게 기억났다. 황급히 고치면서 너무도 아찔했다. 화장이라는 유해 관습이 얼마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비치는지 역설하는 책에서, 그러한 현상을 대표할 만한 단어를 쓸 뻔했다니.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기준 자체에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구글에서 ‘민낯’을 검색해보면 알 수 있듯 한국어에서 ‘부끄러운 민낯’, ‘잔인한 민낯’, ‘굴욕 없는 민낯’은 모두 무척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한국에서 여자에게 화장이라는 가면을 강요하고 여자의 얼굴을 감춰야 할 비밀로 취급하면서도, 화장 뒤편을 관음증적으로 파고드는 문화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생각해보 면, 언어만 한 인공물이 또 어디 있다고 ‘자연’을 논할까? 한국이 여성 혐오 국가인 만큼, 한국어의 여성혐오도 ‘자연스러움’을 입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때부터는 한 단어조차 마음대로 번역하기 어려웠다. 한편으로는 책이 더 많은 사람에게 술술 읽히기를 바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어에서 여성혐오를 배제한 새로운 번역을 해보고 싶었다. 둘 중 하나만 목표로 삼았다 해도 내 능력에 역부족이었을 텐데,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목표를 안고 가자니 죽을 맛이었다. 


가장 쉬운 단어, 누구나 아는 단어조차 몇 번을 갈아엎기도 했다. 세 문장에 한 번 꼴로 등장하는 우먼women 이라는 단어가 그랬다. 책 후반까지 ‘여성’으로 번역을 했다가, 최종적으로 XX 염색체를 가진 사 람을 지칭할 때는 ‘여자’만을 사용하기로 했다. 영어에서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여성성femininity 과 살아 숨 쉬는 여자 women 가 어원에서부터 명확히 구분된다. 이 구분을 포기할 수 없어 ‘여자’로 통일했지만, 임의적인 선택만은 아니었다. ‘젊은 여성’ 대신 ‘여자 청년’을, ‘무 슬림 여성’ 대신 ‘여자 이슬람교도’를, ‘응답 여성’ 대신 ‘여자 응답자’ 를 사용하면서 더 개인의 본질이 부각되는 느낌을 받았다. 대신 ‘여성 억압’, ‘여성혐오’처럼 수식어로 쓰일 때는 ‘여성’을 썼다. 


이 책에는 흔히 ‘성매매’라고 부르는 “상업화된 성 착취”와 관련된 여러 용어가 나온다. 번역하면서도 어려웠고, 이리저리 도움을 구해도 정답이 없었다. ‘성매매’는 자칫 성이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용어다. 타인을 때릴 권리나 죽 일 권리를 매매한다고는 하지 않을 테니 이 단어가 얼마나 현실을 왜곡하는지 알 수 있다. ‘페이 강간’이나 ‘성 착취’ 등도 생각해보았으나 혼동 없이, 가독성 있게 글에 녹여내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했다. 자매들 이 언젠가 더 좋은 용어를 생각해내기를 바라며 ‘성매매’로 통일했음을 여기서 밝힌다. 또 책에 등장하는 ‘성매매되는 여자’라는 말은 제프리스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쓴 ‘prostituted women’을 옮긴 것이다. 성이 ‘매매’되는 과정에서 여자는 주체적인 판매자가 아니며 ‘성 노동자’는 더더욱 아님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성매매되는 여자’를 더 짧게 표현해야 할 때는 ‘여창’이라고 쓰고, 남자일 경우에는 반대로 ‘창남’이라고 썼다. 친숙한 표현에 담긴 여성혐오적 함의를 낯선 표현으로 털어내 보려는 의도였다. 이외에도 뒤 집어도 읽을 때 크게 무리가 없다면 뒤집어보려고 했다. ‘남녀’가 아닌 ‘여남’을 썼고, 의식적으로라도 여자를 남자보다 먼저 호명하려 했다.


페미니스트로서, 번역자로서 꼭 해보고 싶던 시도도 해보았는데, ‘그’라는 3인칭 대명사는 여자를 지칭할 때만 쓴 것이다. ‘그’는 원래 문법적으로 남자나 여자나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남자를 기본형으 로 놓고, 여자는 뭔가 덧붙인 듯 여기기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그녀’라는 대명사가 거북해서 어떻게든 여자를 대명사로 칭하는 것을 피하는 술책을 몇 개 개발해 써왔는데, 이 책에서 남자를 칭할 때 그런 술책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그남’을 쓸까 하다가 일반 독자들을 고려하여 참았다.) 이 책은 여자 저자를 더 많이 인용하고 있기에 여자를 ‘그’로 칭하는 게 훨씬 실용적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여자를 ‘그’로 부르는 게 짜릿하면서도 어색했지만, 뒤로 갈수록 숨 쉬듯 편안해졌다.


번역자로서 나름대로 새로운 말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남성 male ’과 ‘주류  mainstream ’의 합성어인 ‘malestream’을 번역할 때, 남성주 류 대신에 ‘남류’로 번역하고서는 손뼉을 칠 정도로 기뻤다. 우리 문화 속에서 여자들이 무엇을 해도 ‘여류’라며 여성이라는 성별의 독자적인 한계를 갖다 붙이면서, 남자들끼리의 ‘알탕’ 문화는 주류라고 부른다. 이 단어를 번역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여류女流’의 동음의의어인 ‘여류餘流’는 ‘하찮은 갈래’라는 뜻으로 주류의 반대말이기까지 하다. 과연 완벽한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을까? 새로운 번역을 통해 자신들을 주류로 칭하고자 하는 남자들에게 ‘너희는 남류에 불과하다’라고 한 마디 던지고 싶었다.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단어 선택도 있다. ‘처녀막’이라는 여성혐오적, 남성 중심적 단어 대신 실제 신체 구조를 더 정확히 드러내는 ‘질둘레막’이라는 단어를 썼다. 여자의 존재 목적 을 출산으로 보는 관점이 녹아 있는 ‘폐경’이라는 단어 대신 ‘완경’이라는 단어를 썼고, ‘이혼’ 대신 ‘탈혼’을 썼다. 이건 사실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자연스러움’이라는 외피를 입은 여성혐오적 단어들을 넘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번역자로서 새로운 언어를 찾을 수 있도록 “불편한 용기”를 준 메갈리아와 워마드, 트위터와 여성 커뮤니티의 페미니스트 자매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책 전반에 걸쳐 여성혐오적 표현을 피하려고 했지만, 저자가 일부러 여성혐오를 공론화하고 부각시키려 사용한 표현은 최대한 그 역겨움을 담아내려고 노력했고, 한국에서 유사한 표현이 있으면 적극적 으로 가져오기도 했다.(다만 의도적으로 쓴 단어임을 표시하기 위해 원문에 없더라도 작은따옴표를 쳤다.) 제프리스는 서구의 미용 관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한국이 그사이 서구보다 더한 미용 관습 수출국이 된 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조금 과감한 시도가 보이더라도, 이 책의 내용이 절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란 번역자의 의도를 이해해줄 것이라 믿는다. 


번역자가 번역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다는 것은 코미디언이 농담이 왜 웃긴지를 설명하는 것처럼 멋 없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렇 지만 ‘자연스러움’이라는 기준이 깨진 후에 나는 내내 암흑 속에서 가 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내가 했던 고민이 다른 번역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이렇게 긴 사족을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나를 믿고 귀한 책의 번역을 맡겨준 열다북스의 국지혜 대표님과 페미니즘 용어 번역에 있어 너무나 귀중한 조언을 해주 신 박혜정 선생님, 엄마, 할머니, 동생들, 친구들, 언니들, 동기들, 선생님들을 비롯해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 내 삶의 모든 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8년 6월 유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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