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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혜담 Jul 01. 2020

여자로서 여자를  바라본다는 것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후기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엘로이즈는 초상화를 위해 포즈 취하기를 거부한다. 포즈란 결국 남자, 특히 미래 남편이 바라보는 눈을 내면화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많은 여자가 지금 이순간에도 포즈를 취한 채 산다. 마리안느가 첫번째 초상화를 그릴 때, 마리안느도 하녀 소피도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엘로이즈역을 대신한다. 이처럼 남자의 눈에 여자들은 각기 개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며, 특정 기준만 만족하면 얼마든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다. (남남사 하략)



그러나 여자가 여자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도 남자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마리안느가 그린 첫 그림은 관습과 규칙을 따르며 어떤 생명력도 담겨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리안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름 모를 남자의 눈을 만족시킬 그림이다. 어쩌면 마리안느가 분노에 차 첫 그림을 뭉개버리듯 우리는 여자를 바라보는 첫 시각을 버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거기서부터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할 가능성이 피어난다.



작년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연극은 <비너스 인 퍼>였는데 이 연극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나에게는 두 개로 난 길 같았다. <비너스 인 퍼>는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만 등장하는 2인극인데, 여남 관계를 다양하게 변주시킨다. 유명 남감독과 오디션을 보는 무명 배우였다가, 남감독이 배우의 재능을 발견해 뮤즈로 삼았다가, 연극 속에서는 팜므파탈과 발도 핥을 것처럼 그를 숭배하는 귀족이었다가, 남자가 복종하는 SM 관계를 현실로 끌어와도 봤다가, 초자연적인 여신과 남인간으로까지 여남을 대비시킨다. 그러나 그 변주곡에서는 벽만이 느껴진다. 현실의 권력 관계는 예술 속에서도 뒤집히지 않는다. 여남 관계는 뒤집고 갖고 놀아 봐야 막다른 길이라는 결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고 뭐가 다를까? 거기에는 다른 길이 있을까? 영화는 첫부분에서 우리에게 엘로이즈를 훔쳐 보도록 유도한다. 엘로이즈의 허락 없이, 엘로이즈가 아니지만 동시에 엘로이즈이기도 한 어떤 것을, 남에게 넘기려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몰카범이다. 속 안을 파먹고 껍데기만 남은 '뮤즈'를 버려온, 역사 속 수많은 남 예술가다. 그러나 우리가 엘로이즈를 훔쳐보려할 때마다 엘로이즈는 우리를 되쏘아본다. 엘로이즈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는 엘로이즈를 볼 길이 없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나서는 그 영혼에 가슴이 뛰지 않을 길이 없다.



남 예술가와 남 위인에게는 악처가 많다. 나는 그 악처가 사실은 남편의 업적에 절반은 너끈히 기여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여자 가치가 먼지만도 못했던 시절 지긋지긋하게 미우면서도 왜 안버렸을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뮤즈'라는 단어도 맥이 같다. 여자의 웬만한 업적은 지워버리면서 왜 그를 지우지 않았을까?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아, 그저 가만히 있는 정물로 역할을 축소시키라도 했던 것이겠지.



엘로이즈가 보여주는 '뮤즈' 역할에서 나는 진정한 전복을 봤고,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의 가능성을 읽었다. "사랑에 빠지면 다들 뭔가 창조하는 느낌일까?"라는 엘로이즈의 질문처럼, 엘로이즈는 창작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질문을 던지며 마리안느에게 남성 사회의 벽을 뛰어넘은 그림을 그리도록 이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까지 남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계급과 상황이 다른 여자 셋이 카드 게임을 하며 원없이 웃는 장면 같은 것을.



그리고 여자로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여자인 내가 나를 여자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과도 뗄래야 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 중 치마에 불이 붙은 채 앞을 응시하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도, 피임도구도 없던 시절 여자가 여자를 도와 임신중절을 하는 장면을 기록한 그림도, 엘로이즈가 끝내 후회하지 않고 기억하면서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도 좋았지만 마리안느가 슥슥 그린 자화상을 가장 의미 있게 봤다. 엘로이즈 나체에 기댄 거울을 통해 보는 마리안느 자신은, 어쩌면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려야할 자화상을 암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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