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긴 글을, 더 빨리, 더 많이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을 열 개 쓰자고 생각하면 하나를 쓴다. 내가 천천히 짜내듯 쓰는 사람이라 안타까운데 이런 성향이 장점이 될 때도 있다. 사포로 문지르는 과정 없이 바로바로 글을 써버리고 공개해왔다면 분명 여러 번 의도치 않은 가시로 자매를 다치게 했을 것이다. 나와 입장이 다른 자매를 재치 있고 명쾌한 말로 때려눕히는 상상은 한때는 즐겁기도 했으나 이제는 처참하고 피곤하기만 하다.
옳고 그름은 존재한다. 정확히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 없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는 없다. 여자 몸에 가해지는 남성 폭력은 나쁘고, 진정한 여성 해방은 우리가 불러와야 할 미래다. 그러나 무엇이 남성 폭력일까, 무엇이 여성 해방일까.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다르고, 그중 어떤 답은 분명 틀렸다(라고 나는 판단한다.) 어떤 답은 잠정적으로는 맞지만 첨예하게는 틀렸다(라고 나는 판단한다.) 이런 판단은 가부장제의 거친 풍랑 속에서 내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 키다.
예컨대 피어싱은 코르셋인가? 내가 번역한 <코르셋: 아름다움과 여성 혐오>라는 책은 피어싱과 타투와 성형수술을 대리인에 의한 자해로 설명하고 나도 그 논증에 동의한다. 나는 오래전 귀를 뚫었다가 관리를 손 놓아서 막힌 걸 빼면 셋 다 전혀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더 쉽게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누가 왜 피어싱이 코르셋이냐고 상담해오면 아마 청산유수로 설명해주리라. 이 정도는 수학책의 예제처럼 쉽다.
그러나 현실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처럼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피어싱을 한 영향력 있는 페미 유튜버에게 피어싱이 코르셋이라고 지적해야 하는가? 내가 채점을 하는 선생님이라면 '해당 유튜버를 걱정하는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말투로 비공개 개인 메시지로 이 문제를 제기한다'에는 40% 부분 점수를 주고 '해당 유튜버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SNS에서 피어싱이 왜 코르셋인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한다'에는 60% 부분 점수를 줄 것이다. 그리고 'SNS나 댓글 창에서 단정적인 말투로 해당 유튜버를 공격한다'는 0점을 줄 것이다. 마이너스 점수가 가능하면 마이너스를 주겠다. 그건 틀렸다. 어떤 경우라도 틀렸다.
무엇이 100점짜리 대응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페미니즘이라는 38억 명이 하는 팀플에서, 우리가 부분 점수를 따내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 부분 점수 게임에서 우리는 0점만은 피해야 한다. 안 하느니만 못한 페미니즘이 돼서는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틀린(틀렸다고 판단하는) 자매에게 자매애를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낼 때는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각자 처한 위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자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일단은 남들에게 창작물을 내놓는 위치와 익명으로 평가하는 위치는 다르다는 얘기지만 더 보편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한 개인은 각기 다른 궤적을 거쳐 피어싱을, 화장을, 성형을, 남자와의 연애를, 결혼을, 임신을, 출산을 고민하는 자리에 선다. 그 위치는 그가 살아온 삶이고 견뎌온 상처이고 훈장이자 모욕이기도 하다.
나는 무언가가 코르셋이라는 원론을 개인의 인생에 함부로 적용시키기 전에 그 위치 앞에 한 번은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려 한다. '그래, 너는 그렇게 살아남았구나. 잘했다. 아주 잘 견뎌왔어. 일단은 살고 볼 일이다.' 살았으니까 우리가 만난 것이고 살았으니까 앞으로 더 잘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도 일단은 살고난 얘기다. 생존 전략을 고민하는 건 결코 가해가 아니다.
나도 틀린 걸 알면서도 오랫동안 놓지 못한 것이 있다.(이 얘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하려 한다.) 내가 '탈'할 수 있었던 건 결국은 나의 위치 덕분이었다. 번역가라는 직업,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 경험,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 응원해줄 페미니스트 친구들, 이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어땠을까 항상 아찔하다. 그러나 나조차 고통받던 와중에는 주변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가족과 비 페미니스트 친구에게는 자존심 때문에, 페미니스트 친구에게는 '손절' 당할까 두려워서 숨겼다. 나는 철저한 고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게 정말 자의였을까? 탈출한 지금은 고도로 설계된 덫처럼만 느껴진다.
모든 걸 '납작하게' 환원해서는 안되며 '복잡다단'한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종속 기제가 아니라 여자의 삶에 쓰여야 한다. 어떤 자매는 과거의 나처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일부는 살아서 탈출해 무용담을 전하겠지만 나머지는 그 안에서 '밖'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는 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인가? 판단은 날카롭고 자매에게는 물러 터져야 맞다.
모든 것에서 홀로 영원히 탈출한 랟펨 신화를 믿지 말자. 우리는 길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탈출 행렬이다. 우린 사선으로 가기도 하고 뒷걸음질 치기도 하며 잠시 멈춰 쉬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길게 볼 때 대강 앞으로 가고 있기만 하면. 여유가 있으면 힘든 자매를 업어주자. 먼저 앞으로 가서 멀리까지 보이는 깃발을 꽂자. 틀린 자매에게 뭐가 맞는지를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고 증명하자. 내가 틀렸다면... 그래도 누군가는 맞는 이야기를 해왔음에 감사하자. 틀린 자매도 자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