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음마식(牛飮馬食) - 책 이야기
나는 리처드 도킨스에 대해 꽤 호감을 갖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약간 불손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그의 논조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좀 더 엄밀히 따져 나의 사고틀을 만드는 데 조금 더 기여한 측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보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고 생각한다. '록키 호러 픽처쇼'에 빗대자면, 트랜실베니아 성을 지배하는 자는 표면적으로는 프랭크 박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리프래프와 마젠타 남매였던 식이랄까.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손을 내밀고 있다.
흔히 도덕의 본질, 다른 식으로 말해 바람직한 행위의 성질을 '이타적임'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행위는 곧 이타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며 나아가 사람들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인류의 '진사회성(eusociality)'이 일반적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어느 범주까지, 어느 수준까지 이타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타적임의 속성은 사뭇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모든 조건이 같을 때(다행히도 조건이 똑같기는커녕, 대강 동일한 사례도 거의 없다.) 사람들은 비슷해 보이고, 같은 사투리를 쓰고, 같은 믿음을 지닌 이들과 어울리는 쪽을 선호한다. 타고나는 것이 명백한 이 성향은 섬뜩할 만큼 너무나 쉽사리 인종차별주의와 종교적 편협함으로 확대되고는 한다. 따라서 선량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일도 섬뜩할 만큼 쉽다."(p.35)
이런 경향은 다수준 선택, 그중에서도 집단 선택이 인간의 진화와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집단 선택은 집단 내부의 이익을 공유하는 데 있어서 혈연 선택을 뛰어넘는 범위의 구성원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타적 성향을 발전시켜 오는 일에 집단 선택이 기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집단 외부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다른 말로 비도덕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집단 내에 한정된 도덕을 어떻게 집단 외부의 개체에까지 나의 행동을 통해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 행위를 유발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는 그것을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행위의 속성을 지칭하는 데 이기주의니 이타주의니 하는 구분을 사용하지만 이조차도 지나치게 작위적일지도 모른다. 선과 악 혹은 악덕, 미덕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이기적 속성과 이타적 속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지만,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을 이긴다. 혹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더 단순화하면, 개체 선택은 죄악을 부추긴 반면, 집단 선택은 미덕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p.37)
가장 대표적인 진사회성 생물인 개미처럼, 특정한 계층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을 과연 협력 또는 이타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 역시 진사회성 군체에 속한다고 할 때, 인간이 사회, 집단 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행위 등을 우리가 도덕이라는 명목 하에 칭송해 오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에 있어 가장 유효한 혹은 유용한 도덕인지에 대해서는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도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익의 포기, 손실의 감내가 도덕성의 원천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원천적으로- 이익의 발생과 상승이 도덕의 기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이익이어야 한다. 즉 이타적 수단을 통해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려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고려가 모든 행위에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위 말하는 악행은 개인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집단의 수준에서 더욱 잔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때로 어떤 종교에서 나타나는 부족주의다.
"위대한 종교들은 끊임없고 불필요한 고통의 비극적인 원천이기도 하다. 그들은 현실 세계의 가장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현실 이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종교가 지는 절묘할 만큼 인간적인 결함은 부족주의(tribalism)다. 부족주의라는 본능적인 힘은 영성의 갈망보다 신앙심을 형성하는 데 훨씬 더 강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집단이든 세속적인 집단이든 간에 한 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몹시 원한다. 평생에 걸쳐 얻는 정서적 경험을 통해, 그들은 행복, 아니 사실상 생존 자체가 유전적 혈연관계, 언어, 도덕적 신념, 지리적 위치, 사회적 목적, 옷차림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이들과 맺는 유대관계를 토대로 한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다 공유하면 바람직 하겠지만, 대부분의 목적에는 적어도 두세 가지만 공유해도 충분하다.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부족주의이지, 순수 종교의 도덕 교리와 인본주의적 사고가 아니다."(p.169)
그런데 초유기체적 집단의 구성원이 혈연적 관계, 부족적 선택이 아닌 차원에서 집단 이기적 행위(집단 내에서의 개체의 이타적 행위)를 할 때, 그것은 개인의 이익과 상충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 조금 단순화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한 '미덕의 실천'은 일견 이타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집단의 각 개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택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모든 행위 유형은 집단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인간이 개미나 벌과 같은 다른 진사회성 생물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여타의 진사회성 생물은 그 사회 내에, 혹은 그 종에 각인된 본능적 경향을 충실히 실행하는 데 종의 생존과 관련한 성패가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그와 다르다. 인간은 집단의 존속뿐 아니라 동시에 개체 고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생물학적 진화와 선사 시대로부터 역사 시대로 들어서서, 막연한 미래로 현재 매일 점점 더 급속히 나아가고 있는 우리 종의 서사시 자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 속에 바로 그 의미가 담겨 있다고 주장해 왔다."(p.196)
그 방식으로서 인간은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다. 무엇을 최선의 이익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추구해 나갈 것인지, 그에 대한 선택이 인간 행위의 본질일 것이다. 그리고 기대하는 이익을 충실히 충족시켜 나가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나는 이를 위해 과학과 인문학이 손잡아야 한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기원을 보면 둘은 서로 상보적이며, 인간 죄의 동일한 창의적 과정을 통해 나온다. 과학의 발견적이고 분석적인 힘이 인문학의 내성적 창의성과 결합된다면, 인간 존재는 무한히 더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p.210)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이공계열, 특히 에드워드 윌슨의 전문분야로 한정한다면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고 지식을 갖춘 사람보다 인문학에 익숙하고 그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과학의 오만보다 인문학의 오만이 더욱 높고 뿌리 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장을 열 때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그것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지침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