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순례자를 대하는 자원봉사자의 태도 점검하기
2025년 5월 16일 금요일
생장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5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
어제 약을 먹고 후딱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목이 칼칼한 게 흠… 감기가 맞긴 한 것 같다. 이른 오전에는 그나마 순례자 사무실이 여유가 있는 편이라 사람이 더 안 올 때를 기다렸다 조세와 미셸린에게 나 금방 약국 좀 뛰어갔다 오겠다며 길을 나선다. “아이고 어디가 아픈 건데 그래, 여기 걱정 말고 뛰지 말고 천천히 다녀와.” 나 먼저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같은 자원봉사자라서 마음 편하고 감사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원봉사자로서 내 몫을 제대로 해내 이 친절하신 분들께 피해가 안 돼야 한다는 생각에 냅다 약국으로 달려간다. 어젯밤 자기 전에 한 한국분이 블로그에 올려두신 프랑스약 리스트를 캡처해 두었기에 약사분께 사진을 보여드리고 가능한 건 다 구입했다. 이것저것 가릴 상태가 아니라 그분이 추천해 주신 목 아플 때 뿌리는 스프레이, 몸살감기에 좋은 물에 타먹는 약들은 물론 약사에게 추천받아 종합 감기약까지 한 봉지를 사 왔다. 평소보다 살짝 강하게, 이런저런 약을 먹더라도 빨리 이 감기 기운을 떨치고 자원봉사하는데 지장만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뿐이다
순례자 사무실에 돌아오니 다행히 아직 한가했다. 조세가 자리에서 나와 내 머리를 짚어보시고는 사온 약들을 보여달라며 성분을 하나둘씩 확인해 주셨다. 일단 종합감기약부터 털어 넣고, 목 스프레이를 뿌린 뒤 자리에 앉아 순례자분들 안내를 하는데 조금 있으니 조세가 부엌으로 따라오라며 “이거 센 약이니까 지금 먹고, 저녁에 특히 네가 사 온 거 말고 이거 하나 더 먹어!”라며 물까지 떠오시며 살뜰하게 챙겨주신다.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조세가 약을 준지 5분이 채 안 돼 이번에는 미셸린이 자리로 돌아온 내 머리열을 확인한다. 그리고 또 몇 분이 지났을까. 조세가 다가와 내손에 비타민 C 태블릿을 쥐어주며 감기에 좋으니 씹어 먹으라고, 부엌에 둘 테니까 잊지 말고 ‘꼭‘ 챙겨 먹으라고 몇 번이나 내게 다짐을 시키신다. 벌써 70대 중반에서 후반이신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들 다 이렇게 다정하신가? 정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보다도 더 날 챙겨주시네 생각이 들 정도다.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 귀한 고명딸 같은 보살핌을 받자니 그 따뜻함이 참 나이 들어 받기 힘든 종류의 사랑이라 신기하면서도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게다가 조세가 점심시간 전에 식사와 함께할 빵을 사러 돌아오면서 목을 큼큼거리는 나에게 좋을 거라며 반건조시킨 생강을 설탕에 묻힌 생강편을 한주먹 사 오셨다. 사랑이 넘치시는 프랑스의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덕에 오던 감기도 물러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특히나 내가 아플 때 받는 이런 보살핌은 타지에서 자칫 서글플 수 있는 상황에서 크나큰 위안이 된다. 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벨기에 공영방송에서 순례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데요
오늘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벨기에 공영방송에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동시 송출할 순례길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방문하셨다. 순례자 사무실의 전반에 대한 촬영도 하고 자원봉사자들의 인터뷰도 하는데 신기하게 다 영어로 하시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라면 프랑스어나 더치를 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주인공 없는 영상과 내레이터만 있는 다큐멘터리는 아니고, 진행자가 나와 체험과 설명을 하는 식의 프로그램 같았다. 붐마이크를 들고 계신 분과 카메라맨, 마이크를 찬 호스트분이 순례자 사무실 곳곳에 흥미를 갖고 둘러보시며 촬영을 하셨다. 호스트처럼 보이는 분이 게시판에 붙어있는 지난해 국적별 순위를 보시며 “우와~ 이것 보세요. 벨기에는 14위고, 네덜란드는 12위네요.” 혹은 “여기 이 벽에 걸린 지도를 보시죠. 이 긴 길을 걷게 되실 분들이 상상이 가시나요?”, “가방 무게를 한번 재보죠! 몸무게의 15퍼센트 이하가 적당하다고 하네요. 이런이런 무게가 한참 무거운데 자신 있나요?” 등 흥미유발을 하시는 모습이 재밌었다. 순례길을 모르시는 분들 또는 첫 길을 준비하시는 분들의 관심을 유도하며 프랑스길 소개에 더 가까운 내용이 될 것 같은데 이분들은 순례자 사무실 촬영 뒤 바로 차로 이동해서 특정 구간을 걸으실 거라고 했다.
미국에서 아들을 잃고 순례길을 떠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The Way‘가 개봉된 후 폭발적인 숫자의 미국인 순례자들을 프랑스길로 인도했고, 한국에서도 ‘스페인 하숙’과 ’같이 걸을까’ 등의 TV 프로그램이 프랑스길에 대한 로망을 많은 사람에게 안겨주었듯이 요즘시대 미디어의 힘은 무시할 수가 없다. 혹시 알아? 이 다큐멘터리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날지! 올해 말이나 방영된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벨기에와 네덜란드 순례객의 숫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가 살짝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방송이 나가고 그걸 보고 계획을 세우게 되는 분들의 대략적 시간과 영향력이 미치는 시간을 생각하면 내후년 즈음에나 변하는 수치를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그래도 선한 방송의 영향력은 좋다고 본다. 더 많은 사람들이 순례길에 관심을 갖고, 더 다양한 문화가 순례길 안에 공존할 수 있는 이런 징검다리 같은 좋은 계기들이 마련되는 거에 저는 찬성표를 던지겠어요.
근데 솔직히 말이야 순례길을 걸을 때는 ‘순례길 좀 그만 좀 유명해져라.‘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는 거. 왜냐면 나는 TV를 보고 걸은 건 아니고, 진심으로 내 30대를 차분히 정리하고 싶어서 걸은 건데 “TV쇼를 보고 멋져 보여서요” 하고 온 어린 친구들이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오는 게 살짝 불편할 때도 있었다고 할까. 근데 다 걷고 와보니 그것도 편협함에서 나온 내 편견이었음을 깨달았지 뭐야. 그럼 정말 신실한 가톨릭으로서 순례길을 걸으시는 분들이 보는 나는 또 얼마나 우습고 불편한 존재였겠어. 결국에 순례길은 누가, 언제, 어떤 동기로, 어떤 길을, 어떻게, 얼마나 걷느냐는 그 개인의 마음과 결정인 거고 그 의미와 깨달음의 깊이 또한 본인 아니면 모르는 거야. 남보다 더 우월한 길도, 남보다 덜 중요한 길도 없이 모두의 길이 하나같이 귀하고, 다르기에 소중한 거더라. 오늘은 벨기에 방송사 취재하는 걸 보며 순례길을 시작하는 동기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된 오후였다.
순례자를 대하는 자원봉사로서의 자세
오늘 점심은 너무나 신기하리 만치 감기기운 있는 나에게 완벽한 따뜻한 야채 수프가 나와서 보자마자 “제가 딱 필요했던 거예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간간한 수프를 크게 한 그릇 마셔주고 컬리플라워 볶음에 닭구이 한 점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언제나 몸이 아플 때는 약을 먹기 위해서라도, 빨리 몸이 낫기 위해서라도 잘 챙겨 먹는 편인 데다 다행히 아직 입맛이 있어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려 했다. 식사를 마치고 동네 산책을 한 뒤 순례자 사무실로 돌아와 약을 챙겨 먹고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 2시에 순례자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오늘은 한국분들을 20분 정도밖에 못 뵌 듯한데 특히나 아주머니 친구끼리 오신 분들이 많아서 여자친구들 특유의 즐거움과 에너지 넘치는 기운에 나도 힘이 난다. 그중 한 커플은 묵으려던 숙소가 다 차서 갈 때가 없다고 돌아오셔서 숙소 추천도 해드리고, 어떤 두 분은 8시 순례자 사무실 문이 닫을 때 오셔서 내일 돌아오라는 프랑스 자원봉사분들 말에 내가 문 밖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설명을 해드리기도 했다. 생장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오시는 모든 한국분들이 다 내 가족 같고 우리 엄마 같은지라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바빴지만 뿌듯했던 하루 일정을 마치고 밥 먹고 씻고 나와 이제야 인터넷을 하며 쉬는 시간을 갖아본다. 지금 내가 생장에 있겠다, 최근에 올라온 순례길을 시작하신 분들의 글을 몇 개 읽어 보았는데 어라? 이거 내 이야기 같다. 한 한국인 순례자분이 이틀 전에 생장에서 길을 출발하시며 글을 업데이트하셨는데 첫날 사무실에서 한국인 봉사자분이 10kg가 넘는 가방을 보고 여자한테 너무 무거우니 보내는 걸 강력 추천해 보냈는데 가방 메고도 잘 걸었을 것 같았다고, 가방을 메고 올걸 하는 후회의 뉘앙스가 있는 글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 가방이 없으니 마지막에는 날아다녔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 이런 내용을 보니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댕 하더라. 순간 내 개인적인 경험을 순례자에게 이입해 내가 너무 압박했구나, 내가 그분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간 게 아닌가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순례자 사무실의 자원봉사자로 조언은 자제하고, 그분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야겠다
굉장히 젊고 어린 작은 체구의 20대 여성분이 오셔서 더 걱정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첫날은 가방을 많이 보낸다, 몇 킬로세요, 10Kg가 넘으면 정말 무겁더라고요 등등 걱정하는 마음에 한 말들이 그분에게 겁을 준다고 다가왔다 보다. 정말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서 나 스스로를 많이 돌아봤다. 글을 보니 그분은 평소에도 아주 잘 걸으시고 체력이 좋으신 분 같았고 내가 섣부르게 조언을 해서 무거운 가방이라도 도전하고 싶으셨던 그분의 사기를 꺾은 것 같아 속상했다. 정신이 확 드는 게 개개인의 역량과 의지도 다르고 신체적인 조건도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 섣부르게 나 혼자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 가방을 보내는 게 좋다, 안 좋다 그런 사적인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말자고 다짐 또 다짐했다. 어쩌면 이분은 무거운 가방을 한 발 한 발 잘 걸어내시고, 더 뿌듯한 첫날을 보내실 수도 있었던 거 아니야! 내 딴에는 마음 쓰여서 하는 말들이 순례자분들의 순례길에 대한 경험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보고 겪으니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느꼈다.
혹시나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이 언니가 미안했어요. 그렇게 잘 걷는 분이실 줄 정말 몰랐고, 작고 여린 체격에 안 다치고 첫날 잘 걸었으면 했었던 마음이었답니다. 정말 여러 번 생각하고 조심하는 자원봉사자가 되도록 할게요!
미안한 마음 한가득인 저녁이 돼버렸지만 다행히 이런 글을 보고 앞으로 남은 자원봉사 기간을 더 조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날 정비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인 데다 글을 올려주셔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도 순례길을 걷고 계실 그 분 게 죄송함과 감사의 마음을 여기에서 나마라도 적어보는 못난 언니를 이해해 줘요. 그분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부엔 까미노! 앞으로 더 중립적이고 현명한 자원봉사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