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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순례자 선배님들께 배우는 중입니다

Day 4 버나드와 갸또 바스크

by 몽키거
2025년 5월 15일 목요일
생장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4
너무 귀여우신 분들이 많이 온 날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 봉사 네 번째 날이다. 오늘은 너무 어여쁘고 행복한 사연의 순례자들이 많이 방문하셨다. 미국에서 온 20대의 여자 쌍둥이 순례자, 내일이 17살 생일이 되는 친구와 함께 걷는다고 온 세명의 십 대 친구들, 한국인 모녀 순례객과 20년 전에 걸었던 순례길을 추억 삼아 다시 찾으신 해외 거주 중이신 한국인 부부 등 모험을 위해, 추억을 위해, 우정을 위해 순례길을 선택한 이유는 참 다양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 모든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설렘이라는 공통된 감정이 내게도 느껴져 지금 살짝은 긴장되지만 얼마나 즐거우신지 가늠할 수는 있었다.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이분들의 웃음 또한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례자분은 60대의 어머니와 함께 오신 아들 분이셨는데 누가 먼저 순례길 걷자고 하셨냐 여쭤보니 “실은 제 와이프가 응원해 줘서 왔어요!” 하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신다. 어머님과 아들 분 두 분 다 순례길에 대한 생각을 한지 수년이 지나셨는데 아들분은 젊었을 때부터 있었던 버킷 리스트로, 어머님께는 십 년 전쯤 생긴 로망으로 자리 잡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40년간 쉬는 날 없이 가게를 운영하시던 어머님과 선뜻 순례길을 떠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며느님이 “시간을 만들어 가보는 게 어때, 어머님 잘 모시고 다녀와봐.” 큰 응원을 해주셔서 오랜 세월 끝에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셨다고 한다. “제가 잘 걸을지 걱정이에요.” 하시는 어머님께 훨씬 연배 많으신 분들도 아주 잘 걸으시고 부족함 없이 순례길을 걸으실 수 있는 청춘의 나이시라 응원을 드려본다. 총 며칠 걸으실 계획이신가 물었더니 아드님이 여유 있게 40일로 생각하고 엄마를 위해 조금씩 나눠 걸으려고 이미 숙소도 짧은 거리 계산해서 곳곳에 잡아 두었다고 하신다. 이미 아드님은 순례길 박사시니 걱정 안 하셔도 되겠다고, 천천히 즐겁게만 걸으시면 금방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웃으실 거라고 파이팅! 하이파이브를 하고 부엔까미노 인사를 건넸다. 아직 어색하신지 쑥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맞네요, 이제는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하시며 고맙다고 나가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너무 소녀 같으셔서 한국에 있는 우리 엄마 생각이 다 난다. 건장한 아드님이 보디가드처럼 딱 엄마 챙기는 모습이 어찌나 든든해 보이던지. 이렇게 성인이 되고 독립해 가정을 꾸린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순례길을 걸으시는 걸 본 건 또 처음이라 부럽고 멋져 보였다. 부모님과 함께 순례길을 걸으시는 분들은 자녀분이 성인이어도 아직 결혼을 안 한 20대 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신데 말이야. 그래서 더 신선하고 기분 좋은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까. 게다가 모녀도 아니고 모자에 아드님 40대에 어머니 60대 이런 심쿵한 조합 너무 사랑스러웠다.


순례자 선배에게 배우는 순례길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셜을 발급해 주면서 가장 처음 묻는 질문은 “이번이 첫 순례길이신가요?”인데 단순히 아이스브레이킹 용 질문이 아니라 처음이신 순례자분들에게 더 자세한 정보를 주고, 그분들의 궁금한 점을 해소해 드리기 위해 질문을 주고받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시작하는 문장이다. 대부분이 (내 체감상은 10명 중에 9명) 처음 시작하시는 분이데 가끔 엄청난 내공과 순례길 경력을 가지신 분들이 도착하시곤 한다.

오늘 아일랜드에서 오신 한 순례자분이 계셨는데 이번이 벌써 6번째 순례길이라고 하셨다. 와 대선배님이시다! 어디 어디 길을 걸으셨냐고 하니 프랑스 길, 북쪽길, 프리미티보와 포르토 센트럴, 포르토 코스트를 걸으셨단다. 이런 경력자를 만나는 날에는 나도 미래 순례자로서 궁금해지는 게 많아 어느 길이 가장 마음에 들고 추천하고 싶으신지 여쭤본다.

”가장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곳은 당연히 프랑스 길이지. 어딜 가나 숙소니 레스토랑이니 못 찾을 게 없고 사람들도 많아 친구 사귀기 좋은 건 프랑스 길 같아. 가장 경치가 예쁜 곳으로 치면 북쪽길이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프리미티보라고 말할 것 같아. 왜냐면 프리미티보 길은 포장된 곳이 아닌 정말 중세 시대의 자연스러운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거든. 내가 옛날시대의 순례자가 되어 길을 걷는 듯한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 “

이분의 설명을 듣자니 프리미티보 길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다. 아주 짧지만 명료한 표현 안에 그분의 길에 대한 감상이 촘촘히 잘 담겨있는 듯했다.

“포르토길도 많이 예쁘다고는 하는데 조금 짧긴 해. 포르토의 센트럴과 코스트 라인 둘 중에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센트럴을 추천하겠어. 다들 코스트로 바다를 보며 걷는 게 예쁘다 하지만 앞에 끝도 없이 뻗어있는 바다를 보고 계속 걷다 보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게 다 똑같아 보이게 되더라. 조금의 산도 보며 걸을 수 있는 센트럴이 훨씬 마음에 들 거야.”

안 그래도 다음번에는 포르토가 어떨까 조금 고민 중이었는데 이분의 설명이 너무 마음에 들어 만약에 포르토를 걷는다면 센트럴로 걸어야겠다 마음을 굳혔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가진 순례자 선배님들과 만나며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순례길에 대한 인사이트도 조금 엿볼 수 있는 게 순례자 사무실에서 자원봉사하며 얻는 뜻밖의 특별한 선물인 것 같다. 저도 이렇게 순례자 선배분들게 배우고 있는 중이랍니다.


버나드와 갸또 바스크
버나드가 사온 갸또 바스크. 바스크지역에서는 갸또 바스크라는 전통 케이크가 유명하다

오늘 프랑스인 자원봉사자 4인방 중 한 명인 버나드의 마지막 날이다. 원래는 이번 주에 우리와 함께 일하는 스케줄이 아니었는데 친형처럼 지내는 조세를 위해 함께 가능한 날짜만 추가로 같이 봉사하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와 아일린에게 프랑스 자원봉사자들의 말을 도맡아 통역해 주시고, 순례자분들에게 필그림패스를 알려주려고 줄 서 있는 분들께 다가가 미리 등록하시면 편하다 알려주시는 등 늘 직접 나셔서 일해주시던 분이었다. 참 선한고 즐거우신 분과 함께 일을 하며 나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던 시간들이었다.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에게 친절하다는 거, 맡은 일에서 부지런하다는 거,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는 건 잔잔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강한 힘이다. 너무나 좋으신 한 분이 떠나시니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버나드가 생장에서는 바스크 케이크가 유명하니 디저트로 함께 먹자며 미리 사온 바스크 케이크를 꺼내 모두에게 나눠준다. 크~ 이런 게 또 프랑스인의 스위트함인가요. 감탄을 하며 체리콩포트가 들어간 바스크 케이크를 한 입 먹는데 너무 맛있다. 우리 내년에 꼭 다시 봉사활동 같이 하자며 버나드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짧은 인연이라도 길게 갈 기억이 될 거란 확실한 느낌이 온다. 수고하셨어요, 버나드! 우리 꼭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요!


가는 날이 장날,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 순례자 사무실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니 감기 기운이 확 도는 게 느껴졌다. 눈이 꼭 울고 난 것처럼 피곤하고 부은 느낌이다. 하긴 갑자기 4일 내내 수백 명씩 오는 사람들을 대하고, 쉴 새 없이 말을 하다 보니 피곤함은 물론 어디서 감기를 옮겼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내 방으로 올라와 씻고 나오니 벌써 10시인데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거 딱 봐도 감기, 이거 큰일 났다.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평소에 어딜 가든 기본 몸살감기약을 챙겨 다니는데 이번에만 쏙 빼놓고 온 거 있지. 평소의 나 같지 않은 행동에 그냥 아이고 소리와 함께 웃음만 나온다. 다행히도 타이레놀 두 알이 있어 그걸 털어먹고 잠을 청해 본다. 일 년에 한 번 아플까 말까 할 정도로 엄청 건강한데 거참 일해야 할 때 딱 아프게 되다니 타이밍이 야속하다. 속으로 ‘몸아, 많이도 안 바라니 4일만 더 버텨주렴.‘ 부탁을 해본다. 나는 아파도 되는데 순례자들에게 좋은 컨디션으로 제대로 된 정보를 잘 전달하지 못할까 봐 그것만 걱정이 된다. 게다가 감기가 번져 목감기가 되면 목소리가 나갈 수도 있는 상황에 봉사 자체를 못할까 봐 걱정이로구먼. 일단 타이레놀이 잘 듣길 바라는 수밖에. 아프지 말아야 한다, 내가 아닌 순례자분들을 위해서. 다음부터는 어딜 가도 감기약만은 절대 잊지 않고 챙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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