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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가방에 달릴 조개를 만들자

Day 3 급증한 타이완 순례자들이 프랑스 길을 걷는 이유

by 몽키거
2025년 5월 14일 수요일
생장 순례자 사무실 자원봉사 Day 3


순례자들의 가방에 달리는 바로 그 조개를 만들어 본다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 봉사하는 세 번째 날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씻고 옷 입고 1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바로 순례자 사무실이니 통근을 안 해도 되는 게 정말 큰 혜택인 것 같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점심시간 2시간을 제외하고 10시간을 내리 교대 없이 일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되기에 같은 지붕 아래 내가 쉴 곳이 있다는 건 정말 달콤한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열심히 일도 하고, 맛있는 밥도 먹고, 행복한 잠을 청할 수 있는 생장의 순례자 사무실이 며칠 만에 벌써 아늑한 내 집처럼 느껴진다. 어젯밤 잠을 정말 푹 자서 에너지도 충전했겠다, 새로운 순례자들을 맞이하러 문을 열어보자!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아침 8시에 순례자 사무실에 오는 순례자들이 있겠어?‘하고 조금 의아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이 시간에도 방문한다. 대부분 전날 저녁에 늦게 도착해서 잠만 자고 아침에 순례길 시작하기 바로 전에 사무실에서 여권을 만들거나 도장을 받아가시는 분들이다. 그래도 오후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는 게 아침 근무시간 때라 이 한가할 때를 이용해 기부제로 제공하고 있는 순례자들의 가방에 달릴 조개들을 만들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기부금을 내고 가져가실 수 있는 조개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하게 된다


갈리시아에서 온다는 뽀얗게 잘 닦인 예쁜 조개들은 상자 안에 줄을 맞춰 가득 채워져 도착하는데 그럼 자원봉사자들이 큰 기계로 직접 조개에 구멍을 내고, 끈을 엮어 기부가 가능하게 준비해 둔다. 조개가 정말 두껍고 단단한지라 있는 힘껏 기계를 내려 눌러야 쿵하고 구멍이 뚫리는 게 의외로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것도 모르고 낑낑대며 힘껏 조개들과 씨름하고 있으니 조세 아저씨가 오셔서 리버를 왼쪽으로 더 당기고, 송곳 같은 침을 조준해 살짝 이를 물린 다음 힘을 주면 편하다고 자세하게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 그러시곤 곧 장 베누와와 본인도 돌아가면서 조개에 구멍을 뚫을 테니 절대 혼자 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게 귀여우시다. 한참을 조개 구멍을 뚫으며 있었더니 어느새 장 베누와와 조세는 식탁에 자리 잡고 조개에 끈을 매는 작업을 다 끝내가고 계셨다. 이곳 순례자 사무실에서는 모두가 솔선수범을 하고, 서로가 서로를 내 가족처럼 돕는 분위기인 게 참 따뜻해서 좋다. 오늘 새길을 시작하는 순례자 주인들을 찾아갈 조개들이 넉넉하게 준비가 된 것 같을 즈음 빠르게 마무리를 하고 다시 순례자 사무실로 돌아갔다. 정해진 시간과 개수가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틈틈이 여유 있을 때 유동적으로 조개작업을 하는 게 즐겁다. 하나같이 다른 패턴에 다른 색상인 조개들을 보는 것도 신기하고, 순례자 누군가의 손에 선택되어 그들의 배낭에 달려 순례길을 함께할 조개들이 나를 거쳐간다는 것도 재밌고 비록 남들은 모르지만 의미 있는 과정의 작은 일부가 된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일본인 아저씨가 다시 돌아왔다

아침 9시가 채 안되었는데 어제 한 시간 넘게, 순례자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도 계셨던 그 일본인 아저씨가 다시 돌아오셨다. 분명 같은 주제로, 또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아 걱정이 되었는데 고맙게도 아일린이 그분을 맡아 주셨다. 이번에도 30분 넘게 아일린과 이야기하시더니 순례자 사무실의 벽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신 뒤 12시 점심시간이 되어 문을 닫을 때까지 계셨다. 같이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의아해하지만 그 속을 알 수가 있나. 조심스럽게 아일린에게 오늘은 어떤 주제로 오셨냐 물어보니 결국은 론세스바예스까지 한 번에 가기로 결정하고 오셨다고, 이번에는 론세스바예스에 묵고 싶은 공립알베르게와 그다음 날 숙소까지 예약을 해달라 하셨단다. 다행히 다른 순례자가 많지 않은 아침이라 아일린이 공립알베르게 예약을 도와드렸는데 하필 그곳이 만실이라 다른 곳들을 찾느라 오래 걸렸다고 한다. 숙소예약을 못하시는 분이 일본에서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생장은 어떻게 오신 걸까. 마음씨 착한 아일린이 정말 걱정하며 “미안하지만 저분은 순례길을 다 끝내시지 못할 것 같아.”라고 한다. 그 말의 뜻이 이해가 가는 게 순례길은 길을 잘 걸어내는 것 이외에도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밤 다른 도시, 다른 숙소에서 묵는 잠자리를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체력이 안 좋으시다니 길은 더 길어지실 텐데, 걸을 준비만 하셨지 걱정 없이 길을 걷기 위해 수반되어야 하는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해결하실 힘과 마음이 없으신 채로 오셨다는 게 안타까웠다. 지금이야 우리가 프랑스길 시작점에 있는 순례자 사무실이라 정보도 드리고 도움을 드릴 수 있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예약하라고, 원하는 길을 걷게 숙소를 만들어 내라고 하셔도 그걸 들어드릴 사람도, 예약을 도와줄 사람도 없을 텐데 걱정된다. 아무쪼록 내일이 시작이시라니 잘 출발하셨으면 하는데 순례자 사무실을 떠나질 않으시니, 뭐 일단은 저희 눈앞에 안전하게 계시니까 다른 걱정은 미뤄둘게요. (TMI 지만 결국 점심 식사 뒤에도 다시 돌아오셨고 세 시간 정도를 더 앉아 있다 가셨다)


오늘 점심은 바스크 전통 음식으로
Café de la Paix에서 먹은 꼬뜨 드 꼬숑(Côte de cochon)


정오가 되어 순례자 사무실 문이 닫히고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이 왔다. 오늘은 날씨도 너무 좋아 다 함께 외식을 하기로 하고, 생장피에드포르가 속한 바스크 지역의 음식도 있는 Café de la Paix에 갔다. 세계 어느 곳을 여행해도 나는 가능한 지역음식을 먹는 편이라 많은 메뉴 중에 추천을 통해 바스크 음식 중 꼬뜨 드 꼬숑(Côte de cochon)이라는 저온조리한 돼지갈비를 시켜보았지. 와인 한 병을 시켜 다 함께 짠을 한 뒤 곧이어 음식들이 나왔는데 와~ 18유로(2만 8천 원) 음식치고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두툼한 돼지고기가 나왔는데 일단 비주얼 합격이다. 옥수수 가루로 만드는 걸쭉한 폴렌타도 같이 나왔는데 바스크지역의 허브가 더해져 감칠맛 가득한 게 정말 맛있었다. 나는 갈비를 바싹 굽거나 양념에 푹 절인 걸 선호하는지라 고기가 조금 슴슴하다고 느껴졌지만 잘 익혀지고 냄새도 없어 나쁘지는 않았다. 약간 굽기보다는 푹 찐듯한 보쌈 고기에 가까운 구이+찜 중간의 촉촉한 식감이었다. 이렇게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서 같은 부위의 고기살을 두고도 조리하는 방법, 곁들여 먹는 음식들의 다름을 보고 경험하는 건 언제나 재밌고 신선하다. 여기 바스크 지역 음식 소스들이 간간하고 감칠맛 나는 게 한국인이랑 잘 맞는 것 같아 다음에는 어떤 바스크 음식들을 먹게 될지 벌써 기대된다.


타이완이 곧 한국인을 넘어설 것 같아
아름다운 생장의 풍경과 순례자 사무실 메모판에서 찾아볼 수 있는 2024년도 생장을 거쳐간 국적별 순례자 순위


맛있는 와인과 음식, 이야기들을 곁들인 식사가 끝나고 화창한 날씨의 생장을 산책했다. 곧 줄줄이 비소식이 있다고 하니 이렇게 하늘이 좋은 날씨를 베풀어 줄 때 마음껏 예쁜 생장을 눈에 담아놓으려 한다. 살짝 남은 시간에 마실 물과 순례자들에게 나눠줄 사탕이랑 캐러멜들을 사러 나 혼자 까르푸로 빠져본다. 워낙에 외국 대형마트에서 장 보는 거 좋아하는 나인지라 생장에 커다란 까르푸가 있다는 건 내게 아주 큰 기쁨이다. 또 이탈리아와 비교해 프랑스의 과자들이 월등히 맛있기에 아 행복해. 이탈리아 음식들이 맛있다고들 하는데 이상하게 달달한 과자들이 굉장히 평범하고 범위가 적다. 짠 과자도 대부분이 감자침 종류지 대체 이탈리아 사람들은 공산품에 집요하지 않다고나 할까? 음식을 포함해 간식들도 이래저래 연구해서 어떻게 더 사고 먹게 할까 가 아니라 그냥 있는 거에 만족하지 당최 새 걸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신랑이 어렸을 때 먹었던 그런 옛날 과자들이 아직도 부동의 1위이니 나한테 과자를 고르라면 고민도 없이 프랑스 손을 들겠어요. 여하튼 프랑스 까르푸 너무 좋아, 생장 까르푸는 그 규모도 커서 정말 사랑합니다.


오후 2시에 다시 순례자 사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오늘 내가 맞이한 순례자는 약 70명 정도, 그중에 한국분들은 25명 정도였다. 한국분들은 특히나 오후 2시경에 가장 많이 오시는 것 같은데 줄 서계신 순례자분들께 다가가 “혹시 한국분 계신가요?” 라며 한국어로 말을 건네어본다. 물론 한국어로 하니 한국인들만 알아듣고 대답하시는 게 꼭 전쟁통 모스코드처럼 우리끼리만의 소통 언어라 재밌기만 하다. 길게 늘어선 줄 중간중간에서 한국분들이 “저요” 하며 손을 들어주실 때는 얼른 저 따라 들어오시라며 안으로 모시기 바쁘다. 나는 영어/한국어 스피커 자원봉사자이긴 하지만 한국어가 특화된 거니 그거 활용하라고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 이왕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있을 때 한국 순례자분들이 조금이나마 더 편하게 순례자 사무실을 이용하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내가 있을 때만이라도 우리 한국분들 먼저 빠르게, 또 모국어로 편하게 첫 순례길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 쉽게 여권 발급 절차를 밟도록 도와드리려 나름 노력했다. 한국인 봉사자가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 있을 일이 아주 드물기에 이럴 때라도 나서서 챙겨드리고 도움드려야지 싶다.


실제로 2025년 올해 전체 봉사자 명단을 살펴보았는데 내가 있는 주를 포함해 늦여름, 늦가을 여기저기에 단 4주일만 한국인 자원봉사자가 있으셨다. 그럼 1년, 52주 동안 한국인 순례자가 생장에서 한국인 자원봉사자를 만날 확률은 7.7% 로 굉장히 낮은 것. 생장을 거쳐가는 순례자들을 국적 순으로 따지면 한국인이 프랑스와 미국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많기에 프랑스어와 영어스피커가 많은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 한국어 구사자가 희박한 게 살짝 아쉽긴 하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한국인이 성수기를 제외하고 지금 내가 있는 시즌에는 하루에 30명에서 40명 내외로 오시는데 전체 하루 방문객을 따지면 10%가 조금 안 되는 수치니 만국 공용어라고 하는 영어로 더 다양한 국적을 위해 영어스피커 자원봉사자들이 많아야 하는 게 맞긴 하다. 작년 순례자 순위로(생장을 거쳐간 것만) 5위인 이탈리아와 6위인 독일만 해도 지금 우리 자원봉사자 중에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하는 분은 아무도 없으며(내 이탈리아어 실력은 복잡한 설명들을 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독일어 구사자는 한분 밖에 없으니 한국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 같은 상황이라 억울하진 않다.


봉사를 시작하고 며칠 내내 타이완에서 오신 순례자들이 정말 많았는데 지금 수치상 한국인보다 더 많이 방문하시고 계시다. 물론 영어로 설명을 들으시기에 나 말고도 다른 5명의 자원봉사자가 아주 많은 수의 타이완 순례자분들을 받으셨다 한다. 내가 타이완분들에게 왜 이 프랑스길이 타이완에서 유명한지 여쭤보니 순례길에 대한 다큐영화도 있었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물론 까미노를 다룬 유명 인기 유투버의 채널도 그 붐에 한몫했다고 한다. 약간 우리나라에서도 순례길에 대한 로망을 젊은 느낌으로 잘 전달한 지오디가 걸은 순례길 ‘같이 걸을까 와 ‘와 차승원과 유해진이 나왔던 ’ 스페인 하숙‘과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랄까. 이렇게 타이완 순례자들이 많아진다면 2024년 작년 기록으로 12위(1380명)였던 타이완이 3위였던 한국(5011)을 따라잡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대부분이 유렵과 영미권 순례자들로 넘치는 순례자 사무실에서 아시아분들을 뵙는 건 늘 반갑고 즐겁다. 얼마나 먼 길 오셨는지 아니까 나도 더 친절해질 수밖에 없고, 특히나 타이완 분들은 하나같이 착하시고 조용하신 데다 영어소통도 엄청 노력하시는 게 참 감사하다. 그런데 말이야 게시판에 붙어있는 국적별 순위 차트에 전체 3위, 아시아 1위로 Corée Sud, 한국이름이 떡 하고 있는 걸 보자면 뭔가 뿌듯하단 말이지. 외국살이 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은근히 자랑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나 봐. 개개인의 여정이 중요한 거지 수치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생장 순례자 사무실에서는 우리 한국이니 쫌 하네 느낌이랄까. 그냥 2025년 5월에 마음속으로 혼자 뿌듯하고 으쓱한 한국인 봉사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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