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관두고 베이징으로
프롤로그
결혼을 했는데 신랑이 베이징으로 발령이 났다.
돌아올 때까지 기러기로 지낼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마뜩잖은 시선을 받았다.
실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도 이미 발령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시기가 처음 얘기했던 것과 달랐다. 회사 욕이야 어떻게라도 할 수는 있지만 나는 일하고 있던 국제교류 분야가 좋았다. 어떻게든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 한 켠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도 물론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부모님은 결혼 한 여자가 직장을 관두고 가정에 매이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포기하기는 아까운 학력과 커리어라고, 애지중지 키웠다고 티는 내지 않으셨으나 한껏 아쉬워하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서핑 초보가 아무리 패들링을 해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의 파도는 동해바다의 그것처럼 쉴 틈 없이 밀려들어서, 나는 차라리 이대로 해류에 몸을 맡기고 해안가로 밀려나야겠다고, 뭔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이토록 많은 소금물을 들이켜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응원의 손짓과 아쉬움의 외침을 뒤로하고 해안가로 나왔다. 나가려고 했다. 나가는 길목도 파도에 발이 잡혀 모래에 발이 파묻혔다. 발걸음은 무겁고 서핑보드는 버거워서 모래사장으로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내 몸뚱이마저도 천근만근이었다. 휘청거리는 사람은 나뿐이 아니어서 해안가는 상당히 붐볐다.
베이징에서의 생활은 점수에 맞춰 간 대학보다도 더더욱 나의 의지와는 거리가 먼 종류의 선택이어서,
나는 그렇게 자주 아팠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어깨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밥도 못 먹고 자주 체했고, 자존심에 어디 티를 내지도 못하고 배우자만 계속 타박했다. 신랑도 멍청한 사람이 아니기에 '자유의지'의 함정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내가 나의 '자의'로 여기까지 밀려왔음을 애달피 여겼고, 딴에는 최선을 다해 나를 돌보려 애썼으나 열심히만 했을 뿐 잘하지 못했다.
'열심히 한다'와 '잘한다'는 동의어가 아니다.
남들은 '주재원 남편 만나 해외에서 편하게 산다'라고 하겠지만 정작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고 몸은 더더욱 불편했다. 돈을 펑펑 쓰기엔 서울 물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언어도 안 통해서 더더욱 일상을 옥죄었다. 툭하면 홀로 드라이브를 나가거나 친구들과, 때로는 홀로 여행을 떠나곤 했던 나에게는 무인도와 마찬가지였다.
시간 많으니 취미생활이라도 해려는데, 언어는 노력으로 극복한다 치더라도 뭘 배우는 데에는 돈이 들었다. 돈 안 드는 취미란 건 한계가 명확했다. 문제는 나는 남편에게 돈을 타서 쓰는 자체가 어색해 죽을 것 만 같았다. 신랑은 '경제공동체'라며 누가 누구에게 돈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했으나, 그는 매달 돈 넣어 주는 걸 왕왕 잊어서, 구차한 말을 꺼낼 상황을 만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라면 아마 진통제 종류인가 보다. 피를 멎게 하지도, 흉터를 없애지도 못하지만, 그저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진통제. 결국 낫는 건 내 몫인데, 난 아무래도 회복력이 썩 뛰어나지 못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주 보잘것없지만 어떻게든 나아져 보려고 끄적임을 시작했나 보다.
오, 그러면 이런 거 말이야, 우리 저번 주말에 거기 가서 완전 미친 거 봤잖아. 그런 거 쓰면 되겠네!
그렇게 쓰고 싶으면 네가 써...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내가 알려줄게~ 먼저 그 내가 사진 보내줄게 내가 찍어 놓은 있어! 다 널 위해서 이렇게 찍어 놓은 거야.
아 그럼 네 머릿속에 있는 거 네가 써라. 왜 나를 통해 대리만족하려고 해?
나는 못하니까 나는 널 통해서 대리만족할 거야. 유령작가 같은 거?
대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머리 좋다며. 이제 네가 쓰고 싶은 글도 내가 대신 써 줘야 하냐.
처음 타자를 치기 시작할 땐 남편의 모자란 부분을 하염없이 나열했고, 지금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와 단 둘이만 있었으므로, 눈에 뵈는 게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집에 있는 시간이 길고 교류하는 사람의 수가, 특히 코로나 이후로 육성으로 대화하는 관계의 수가 대폭 줄었기에 밥상머리와 잠자리를 공유하는 이가 제일 눈에 밟힐 수밖에 없다.
이윽고 싫다고는 했으나 그의 아이디어들이 좋은 건 또 사실이어서, 그가 제안했던 아이템들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맞닥뜨렸던 충격, 텐진, 난징, 상하이의 대도시에서 맛보았던 짭조름한 달콤함을 썼다. 다통이니 핑야오니 하는 낯선 이름의 도시들은 그가 아니었으면 평생 몰랐을 곳이어서, 그의 시선을 안경처럼 쓰고 글을 써 내려갔다. 낯설었던 세상이 점차 편안해졌다.
손가락이 조금 더 풀려서야 나의 삶이 조금씩 글에 더 녹아 나오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는 먼저 한국에 돌아왔다.
남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글쓰기를 지지해주었다. 부모도, 시부모도, 지인들과 현직 작가도 글을 쓰라고 독려했다. 벅찬 응원 뒤에는 고맙게도 제각기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뭐든 부지런히 썼다. 써야만 돌아보고 얻어지는 종류의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이방인이어서 중국이 힘들었던 게 아니었다던가(절대적인 상식 밖의 그 무엇이 있었다), 중국이어서 이방인이었던 게 아니라던가(생각해보니 한국에서도 나는 낯선 존재였다), 누구나 누군가에겐 이방인이라던가(결혼까지 했어도).
처음에는 생각나는 대로, 그다음에는 손이 흐르는 대로, 한참 뒤에야 생각이란 걸 좀 하다 보니 글이 몇 편 모였다. 잡다한 단상들이지만, 고슴도치의 마음으로 모아 모아 브런치 북으로 모아보았다.
모아놓고 보니 더욱 앞뒤가 안 맞는 것도 같지만,
도치맘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