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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Nov 20. 2022

디스크가 남긴 것

DAY 16. 탑(Tower)

- 천재지변은 공든 탑, 안 공든 탑을 가리지 않고 않아요. 하지만 시간고 마음을 많이 쏟은 것일수록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남겨지지 않고 어깨에 지고, 마음에 품고 떠나기도 하는 것 같고요. 내 삶의 천재지변에 대한 이야기를 써주시겠어요?
- 이 카드는 반대로 전혀 빛이 안 보이던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기쁨이나 돌파구, 통찰로 해석되기도 해요. 기대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 배움을 발견했던 경험을 써주세요.
   - <나를 껴안는 글쓰기> 슝슝



나에게 목디스크가 찾아온지 1년이 넘었다. 

 디스크 판정을 받던 날, 수술대에 엎드린 채로 간단한 마취를 하고 간단한 시술을 받았다. 목에 굵은 주사기 같은 것을 밀어 넣고 디스크로 눌린 신경을 복구하는 간단한 시술이지만, 아직도 그 고통이 생생하다. 현관에서 신발끈조차 풀지 못해서 낑낑거리다 어처구니없어 눈물이 났었다. 간신히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워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저녁을 같이 먹어주겠다면서 우리 집에 와서 초밥을 배달해 먹고, 그 전날 내가 남겨두었던 설거지마저 말끔하게 해치운 다음 떠났다. 2020년까지는 킥복싱도 하던 나였는데, 그렇게 2021년은 뒷목을 잡고 누워있다가 끝이 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못했다. 그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때가 체육대회였다. 표지에 '상'이라고 크게 적힌 공책을 휩쓸어 오던 오빠와 그래도 조별 달리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동생과 달리 나는 참가상 용으로 모든 반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책 한권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내가 속한 청군이 이겼을 때는 두 권을 가지고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나는 나를 '운동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던 것 같다. 그래도 디스크를 가지고 아프지 않으려면 운동을 해야 했다. 몇 년 전에는 '못해도 평온한 킥복싱'을 했지만, 목디스크를 가지고 다시 시작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가 시작될 무렵 친구와 함께 집 앞 헬스장을 등록했다. 마침 처음 생기는 헬스장 이어서 할인도 하겠다 2:1로 PT와 필라테스를 등록했다.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차렷 자세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목디스크로 뻣뻣한 몸이 더 뻣뻣해져서 아무리 어깨에 긴장을 풀고 파을 내려도 팔이 몸통에 잘 붙지 않았다. 3월 정도가 되어서야 몸통 뒤로 두 손을 겨우 잡을 수 있을 만큼이 되었다. 피티 선생님과 필라테스 선생님은 수업의 20분 정도를 스트레칭에 할애했다.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다음날 온몸에 근육통이 찾아왔다.


 벌써 11월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운동을 하고 있다. 

지금 함께하는 피티 선생님은 6월 중순에 처음 만났는데, 그때는 나도 많이 발전해 있었다. 선생님은 편견 없이 헬스장에 있는 다양한 기구들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 그 이전에는 기구보다는 유산소와 근력을 섞은 듯한 맨몸 운동들이 대부분이어서 신선했다. 


 "정은님은 운동 신경이 나쁘지 않아서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 얼마 전 턱걸이 기계 앞에서 가장 쉽게 기계를 조절하면서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엄청 놀라 선생님께 다시 물어보았다. 

 "저 엄청 운동 못하지 않나요?"

 "정은님 정도면 못하는 편은 아니죠! 체력이 없어서 마지막에 좀 지치기는 해도, 그건 운동하다 보면 차차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한 대로 턱걸이 기계에서 10회씩 3세트를 마치고 거친 숨을 내쉬면서 내려왔다.


 Not bad. 나쁘지 않다.

나는 그 말이 쏙 마음에 들었다. 나도 모르게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나의 못난 자아상, '운동 못하는 사람'이 깨어졌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이참에 그 자리에 새로운 자아상을 세우기로 했다. 11개월 정도 운동을 꾸준히 했으니 그래도 좀 멋진 호칭을 쥐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자아상은, '운동 꾸준히 하는 사람'이다. 조금 과하다 싶지만 그게 또 마음에 든다. 이마에 붙이고 다닐것도 아니니까.


목디스크는 요즘도 한 번씩 나를 찾아와 괴롭힌다. 그래도 그것이 나에게 남긴 것이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더욱 빛나는 자아상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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