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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Jun 16. 2020

가끔은 외동이고 싶었습니다.

글 쓰는 딸과 시 쓰는 아빠 -2. 가족

형제들과 따로 자라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도시로 와 엄마, 아빠, 오빠, 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여동생은 김천에서 2년 동안 유치원을 같이 다녀서 친해졌다.  남동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핏덩어리였기 때문에 나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엄마와 아빠와 오빠는 나에게 조금 어려웠다. 유치원 방학 때마다 며칠 정도 같이 지내긴 했지만 나는 가족보다는 손님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는 아파트의 방 하나를 내가 쓸 수 있도록 꾸며 주었다. 처음 가져보는 책상이 어색했지만 기분 좋았다.


처음 부모님 집으로 와서 살 때는 잠을 자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엄마가 예쁘게 꾸며준 내 방이었는데 불만 끄면 무서웠다. 도시의 12층 아파트에서는 시골에서 듣던 벌레소리, 낡은 창 사이로 들어오던 가로등 불빛, 나무 사이를 지나는 경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 않았고, 너무나 고요했다. 같이 잠을 자던 큰고모도 없었다. 나는 이불속에서 웅크리고 울었다. 엄마가 약간 놀란 듯이 들어와서 아직 혼자 자는 거 무서우면 같이 자자고 나를 데리고 안방으로 갔다. 그리고 며칠을 안방에서 지내고, 겨우 내 방에 적응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방에 불을 끄면 장롱 속에 사는 도깨비와 유령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는 더욱 힘들었다. 나는 시골에서 글자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담임 선생님께서 적어 주신 알림 장을 제대로 적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깨끗한 글씨로 칠판에 적어주는 내용을 공책에 연필로 따라 그렸다. 엄마는 집에서 내 알림 장을 보고는 매우 속상했다고 한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내 알림 장의 글씨를 못 알아보니 매일 똑똑한 친구네 집에 전화를 해서 알림 장을 새로 받아 적으셨고, 그 내용대로 내 준비물을 챙겨주셨다고 한다.


학교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항상 배가 아팠다.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셨는데, 오빠는 ‘얘는 왜 맨날 배가 아프냐’고 했다. 엄마는 ‘원래 배가 매일 아플 시기가 있단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 눈치 보느라 힘들어한 것을 이미 알고 계셨나 보다. 오빠는 무척 활발한 어린이여서, 생각보다 쉽게 친해질 수 없었지만, 중고등학교에 가서 같이 만화책을 빌려보다가 상당히 친해졌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여동생이 유치원을 졸업하고 함께 지내게 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참 기뻤다. 이제 혼자 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려고 누웠다가 싸워서 벌을 서는 날도 종종 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잠들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둘만의 상상의 세계를 만들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침대에서 한 명은 침대 위에서 자고 한 명은 침대 아래에 이불을 펴고 잤는데, 침대를 차지하기 위한 게임이 아주 대단했다.


갓난아기인 남동생은 내 눈에는 천사로 보였다. 엄마가 오후에 장을 보러 나가시기 전에 젖병에 적당히 분유를 넣고, 보온병에 물을 채워 두셨다. 그리고 막내가 깨면 흰색 큰 눈금에 맞게 물을 부은 다음에 잘 흔들어서 주라고 나와 여동생에게 당부하고 나가셨다. 보통 막내는 울지도 않고 조용히 일어났다.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한번 안아주고는 엄마가 시킨 대로 젖병을 물려주었다. 아기 주제에 젖병을 누워서 다리 사이에 끼고 쪽쪽 잘도 빨아먹었다. 그리고는 주로 나의 배나 등에 기어 올라가서 다시 낮잠을 잤다.


그 시절 여아용 내복은 핑크, 남아용 내복은 파랑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때 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었지만, 때로 나는 외동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그렇듯이 나도 옷을 물려 입었다. 그중에 가장 싫은 것은 내복이었다. 오빠에게 물려받은 내복은 파란색이고, 남자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로봇이 그려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내복 바지에는 남아용에만 있는 오줌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내복은 내가 입고, 또 여동생에게 물려 내려갔다. 막내는 우리와 나이 차이가 상당히 있어서 옷을 물려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와 여동생이 항상 헌 옷만 입었던 것은 아니다. 엄마는 여동생과 나에게 상당히 깜찍한 옷을 많이 입히셨는데, 가끔은 색상만 다른 옷을 사주실 때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고백이지만, 나는 엄마가 나에게 사주는 노랑보다 동생에게 사주는 분홍을 더 좋아했다.


하루는 집에 왔는데 식탁에서 여동생이 엄마를 앞에 두고 펑펑 울고 있었다. “오빠는 오빠라고 잘해주고, 언니는 언니라고 잘해주고, 막내는 애기라서 잘해주고, 나는 머야?” 여동생은 엄마가 자기만 차별한다면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나도 지난주에 엄마한테 펑펑 울면서 나만 차별한다고 따졌었는데, 여동생을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솔직히 여동생이 나보다 더 낡은 옷을 물려받고, 더 많은 옷을 물려받았다. 나보다 더 외동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우리 사 남매는 모두 어른이 되었다. 성격도 직업도 다 다른 사람으로 자랐다.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 어쩜 이렇게 다 다른지 신기할 지경이다. 어른이 되고 나니 형제가 많은 것이 참으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번도 외동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내가 외동이 아님에 참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 남매의 장녀가 아닌 오 남매의 막내가 되어 있었다. 오 남매가 된 이유는 오빠가 결혼해서 나에게 언니가 생겼기 때문이고, 막내가 된 이유는 모든 형제들이 나의 성장을 도왔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내 마음속에 병들어 있는 한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우리 온 가족이 필요했다. 그것은 마치 ‘가족 같은 회사’가 아닌 ‘회사 같은 가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가족이 회사에서처럼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나에게 최선을 다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의 운동치료사가 되어서 아침에 산책을 데리고 나가셨고, 엄마는 나의 주치의가 되어서 식사와 잠자는 시간을 챙겨 주셨다. 오빠는 나의 재활치료를 도왔다. 오빠 카페에서 일하면서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 마음의 근육을 키웠다. 새언니는 나의 상담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그 무렵에 나는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는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물어봐 주고, 내가 가끔 많은 이야기를 내뱉을 때는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었다.


한 번은 나와 언니가 오빠 카페에서 쓸 접시와 컵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간 적이 있었다. 우울증이 한참 심할 때는 가끔 뇌의 신호가 손끝으로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상당히 비싼 가게였는데, 내가 실수로 가게의 접시를 떨어뜨렸다. 한 개에 3만 원 정도 하는 비싼 접시였는데, 대리석처럼 반질반질한 백화점 바닥에 닿는 순간 와장창 깨져 버렸다. 점원들과 언니가 다가왔고, 내 뇌는 동작을 멈추었다. 언니는 가게 점원 분들에게 사과를 하고 나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아가씨, 안 다쳤어요? 이건 내가 치울 테니 다른 그릇들 좀 더 봐요. 이 집에 예쁜 것이 많아서 이것저것 살 거니깐요. 이 접시랑 같이 계산할 거니까 천천히 봐요.”라고 말하고, 나 대신 깨진 그릇 정리를 도왔다. 마치 내 것이 아닌 듯한 뭉툭한 손끝이 혹시라도 다칠까 봐 걱정을 했나 보다. 그렇게 언니는 예쁜 찻잔세트 2개와 깨진 접시를 계산하고 가게 점원들께 죄송한 마음을 다시 전하고 쇼핑을 마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에 자책하지 않고, 우아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여동생은 갑자기 나의 엄마가 되었다. 혼자서는 세탁소에 셔츠 하나 못 맡기는 언니를 위해서 지난 살림살이들을 알뜰하게 정리해 주었다. 물건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게도 보는 순간 예전의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 동생은 아픈 언니를 위해서 결혼사진부터 시작해 잡다한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동사무소에서 대형 쓰레기 스티커를 사 와 추억이 담긴 다 떨어진 소파나 곰인형을 버려주고, 찬장에 쌓여 있는 신혼여행 때 사온 쓸모없는 잔들도 대신 처리해 주었다.


남동생은 자신의 아픈 첫사랑의 추억을 나에게 떠들어댔다. 원래 애교가 많은 성격이어서 같이 있을 때마다 힘이 났지만, 더 예쁜 말과 힘이 되는 말을 많이 해줬다. 본인은 삼수 벌레에다가 입사도 재수했는데,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누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최선을 다해 응원을 했다. 밥 먹을 때마다 비타민을 챙겨주고,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함께 자라고 나에게 빌려주었다.


어릴 때는 아픈 부모님을 대신해 내가 형제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세상을 피해 내가 내 안에 숨어버리자, 나의 상처 입은 자아는 이렇게 형제들이 돌보아주었다. 지금은 내가 형제 많은 집에서 자란 것이 너무 큰 행복임을 잘 알고 있다.




첫 서열

          - 이영배


돼지우리 헛간 안쪽 뒷간이 있다

초를 다투듯 급하게

바지를 내리자마자 쏟아졌다


휴지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는

한참 즐기고 신났던 뒤다


갑수한테 딱지를 너무 많이 잃었는데

친구들 백구 마당에 아직 있을까


늘 하던 데로 여고생 누나 이름 불렀다

대답이 없다, 더 큰소리로 외쳤다

–영숙아 종이!


오금은 점점 쑤셔오고 대답은 안 돌아오고

외치다 외치다가 울음 반 애원 반

-누나 종이,

-누나 종이,

-오늘부터 누나라고 할게!


그날부터

휴지 가져다주며 빤히 웃던 그 앙큼한 누나

첫 서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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