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픔에 무뎌지고, 세상을 혼자서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 느낀 점은 어른도 그냥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내가 독립한 하나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가 어느 날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많은 어린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엄마와 아빠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조화를 잘 이루는 사람으로 보였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어른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는 병원에 오래 계셨고, 내가 너무 어리기도 해서 할머니와 쌓은 추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슬펐지만 세상이 떠나갈 정도의 슬픔은 아니었다. 그때의 아빠는 집에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거의 자지 않고, 마당에 나가서 곡을 하셨다.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는 아빠의 목이 쉬어도 계속되어서 아빠가 슬퍼 보이기보다 존경스러워 보였다. 아빠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목으로는 곡을 흘리셨나 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빠는 간암으로 병원에 계셨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아빠의 병간호로 엄마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집안일을 해야 했다. 집안일이라고 해봐야 엄마가 밤새 만들어 놓고 가신 반찬들을 덜어서 밥솥이 한 밥을 꺼내 형제들과 먹고 설거지를 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아빠의 병간호를 정말 완벽하게 해내셨지만, 가끔씩 베란다에서 한숨을 깊게 쉬시거나 눈물을 흘리셨다. 맏딸인 나는 몰래 그 모습을 보았지만, 다른 형제들에게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아빠가 대수술을 결심했을 때 엄마가 가장 힘들어 보였다. 엄마는 병원에서 환자가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고 어려운 말로 빼곡히 적어놓은 수술 동의서에 씩씩하게 도장을 찍으셨지만, 이별에 대한 불안을 쉽게 떨치진 못하셨을 것이다.
몇 차례의 수술을 받고 퇴원을 하시고, 안정기가 찾아오면 아빠는 다시 일터로 우리 사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나가셨다. 아빠가 출근을 하시면, 엄마는 우리들에게 아빠가 많이 웃어야 한다면서 요즘 아빠를 많이 웃겨 드리라고 당부를 했다. 아빠는 일터로 가셨다가 다시 암이 재발하여 치료를 받으셨고, 그러한 과정을 몇 번이나 겪으셨다. 긍정적인 엄마는 아빠가 그래도 일찍 아파서 자기 관리하는 법을 배운 것이라고, ‘이렇게만 잘하시면 나중에는 걱정도 없다’고 항상 이야기하셨다. 실제로 엄마의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항암 치료 때문인지 유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의 머리는 조금 벗겨지셨지만, 아빠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시를 쓰는 멋진 할아버지가 되었다. 손녀가 놀러 오면 아빠는 손수 ‘나비야’, ‘송아지’와 같은 동요를 기타 연주로 들려주면서 합창을 하는 멋쟁이 할아버지다.
종점
- 이영배
오일장 갔다 하면
늘 막차 타고 오시던 아버지
고등어 한 손 손에 들고
그 한 밤 으악새 슬피 부르면,
어두컴컴한 골목 끝에서 당신은 안 보이고
껄껄껄 웃음소리가 먼저 나타났지
그 아버지 이제, 합죽 볼에 핀 검버섯
풀무 소리 나는 깡마른 가슴, 구부정하게 휘어진 다리
버스 종점 훤히 보이는 요양병원
여러 곳 돌다가 마지막 찾은 그곳
헐렁한 환자복 움푹 파인 눈매, 아들 눈 쳐다보는 처진 눈꺼풀
두 눈시울 그렁그렁, 우리 집 우물처럼 고였네
진통에 떨고 있는 링거액
일없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창밖엔 불빛만 가물가물한데
버스 종점 힘겹게 돌아온 막차
언제쯤 돌아 나갈까
사실은 이런 시절이 온다고 10년 전에는 꿈도 못 꿨었다. 대학원 무렵 아빠는 병세가 심하게 악화되었다. 간성혼수로 기억도 오락가락하시고 잠도 주무시질 않고 화를 내곤 하셨다. 엄마는 10년 넘게 병마와 당당하게 싸우던 자랑스러운 남편을 보다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남편을 보면서 절망하셨다.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다가 엄마의 다급한 전화에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오빠와 동생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어서 집에서 나와 엄마만 아빠를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미국 연구소에 인턴 합격서를 받게 되었다. 가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너무나 고민이 되었다. 엄마가 별일 없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나를 배웅하셨다. 떠나던 1월은 지금껏 겪은 겨울 중에서 가장 시리고도 힘든 겨울이었다.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여동생에게 메일이 왔다. 아빠의 상태가 많이 위독하시단다. 서울 병원에 취업한 동기들에게 연락해서 간이식 수술을 가장 잘한다는 선생님을 알아보고 유일하게 서울에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 뒤를 좀 부탁한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서 학업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20대 중반의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은 여전히 어렸고 너무나 무서웠다.
간이식을 위해 가족들은 차례차례 준비를 했다. 오빠는 맏이답게 본인이 이식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취업을 해 열심히 일을 하던 오빠의 간은 음주와 과로로 간이식에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우리 집에서 혈액형이 혼자 다른 엄마가 이식을 하겠다고 했지만 안되었다. 내가 한국에 갈까 하고 이야기해보았지만, 여동생이 여자의 간은 남자의 간보다 작아서 이식에 성공할 확률이 작다고 했다. 결국 수능을 망치고 재수를 하기 위해 재수학원에 다니던 남동생이 아빠를 위해 간을 이식했다. 그때부터 남동생은 우리 집의 귀염둥이에서 영웅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물론, 매우 말을 안 듣거나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가 많지만, 언제나 영웅 대접을 해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아빠가 가끔씩 입원하면 늘 비슷한 슬픈 느낌이 밀려온다. 그때마다 맡았던 화학약품과 피비린내가 섞인 중환자실의 냄새가 가슴 깊은 곳을 후벼 판다. 몸에서 열이나 물수건으로 닦아 내던 때에 퉁퉁 붓고 거칠어진 뜨거운 발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힘없는 아빠의 목소리도 떠오른다. 아빠의 곁을 떠나지 않는 엄마의 눈은 며칠을 깨어 있었는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모님께서 모두 건강하신 지금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르겠다. 내가 60이 넘어 내 자식이 다 자란다 하더라도 부모님을 여의면 고아가 된 느낌일 것 같다. 어른이 되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아빠는 여전히 울지 않았지만, 고아가 된 눈동자를 하고 계셨다.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