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세상의 반은 남자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적어도 내 세상에서는 80%가 남자인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렇게 축복받은 세상에 산다고 해서 남자 보는 눈이 늘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과 남자로 보는 것은 정말이지 다른 종류의 고찰이 필요하다.
나는 여중과 여고를 나왔다. 6년 동안 남자라는 생물과 거리를 둔 채로 자라 대학에 왔다. 여대를 지원하려고 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는 키가 작고 그래 가지고 외모로는 어필을 못한다. 그러니깐 공학 가야지 연애라도 한번 하지, 니가 여대 가면 선도 제대로 못본데이” 세상 모든 엄마의 말씀은 옳다. 문제는 내가 연애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에 와서 친구를 사귈 때,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 방법을 썼다. 친구와 숙제를 같이하고, 날씨가 좋으면 하굣길에 걸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잔디밭에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집에 가는 길에 같이 떡볶이를 사 먹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친구 만들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했지만, 친구의 80%가 남자인 상황에서 이런 방법은 최악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친구랑 집에 가는 길에 수다 떨다가 아이스크림을 사서 벤치에 앉으면 갑자기 친구가 고백을 했다. 대체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인터넷 용어로 ‘고백해서 혼내주자’라는 것을 15년 전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나의 평범한 친구 만들기 방법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이가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를 보고 별로 안 친한 아이가 고백을 했다. 친구가 고백하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렇게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나의 첫사랑은 군대에 가서 TV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내가 자료구조와 알고리즘에 빠져 살 때쯤 내가 너무 못생겨졌다고 이별을 고했다. 거의 1주일 정도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 너무나 좋은 추억과 이상한 추억과 나쁜 추억과 힘든 추억을 가져다준 아이였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다음 사람을 만나자마자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느낌만 남고 거의 기억이 안 난다는 점이다. 이래서 여자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첫사랑이라고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 다음 남자친구가 생기고 나서, 첫사랑을 길에서 만났는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야~ 반갑다. 잘 지냈나? 인사해라. 여긴 내 남친이고, 여기는 그냥 동아리 동기!"
그렇게 첫사랑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C#과 JAVA에 내 목숨을 걸던 시절에 나는 항상 사물함에 체육복 반바지를 넣어두고 다녔다. 금요일이 되면 한주의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체육복 반바지를 입고 실습실에서 밤을 새워서 코딩을 했다. 같이 밤을 새우던 복학생 선배들, 친구들과 함께 밤 12시면 시켜 먹던 호식이 2마리 치킨이 내가 불금을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여느 때처럼 야식을 시켜 먹고 정리를 하는데, 어떤 선배가 지갑을 놓고 간 것이다. 내가 그 지갑을 주워서 가지고 있었는데 다음날이 되어도 찾지를 않았다. 지갑을 찾으면 놀려주려고 했는데 과제에 너무 열중해 있어서 놀리지도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지갑을 내가 스스로 돌려주었다. 열심히 코딩하던 그 선배는 JAVA 프로젝트에서 2등을 했다. 그리고는 지갑이 은혜를 갚고 싶어 한다고 나에게 은혜 갚을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이 나의 전남편 되시겠다.
나는 당시에 남자를 보는 기준이 확고했다. 딱 다섯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남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멍청이였다. 그 조건은 하나. 동시에 여자를 여럿 사귀지 않는 사람, 둘. 술을 마시고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 셋. 마니아 기질이 강해서 아르바이트비를 몰빵 하지 않는 사람, 넷. 끈기 없이 하던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 다섯.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다. 나중에 친구들은 나에게 그냥 담배 안 피우는 보통 남자를 참으로도 길게 늘여서 적어 두었다고 평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똑똑하고 무엇보다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애교도 많고 귀여운 데다 성적도 좋으니 부모님도 마음에 들어하셨다. 그 오빠와 5년 동안 연애하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일들도 나의 첫사랑 남자와의 일들과 비슷하게 어떠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헤어지면 기억을 상실하는 나의 뇌가 너무 사랑스러운 대목이다.
5년 정도 연애하고 잠시 헤어졌던 적이 있다. 그 오빠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무나 작아져서 먼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헤어지고 엄청나게 힘들 무렵 우리 집에 큰일이 닥쳤다. 간 이식을 하신 아버지에게 암이 재발한 것이다. 나는 엄마와 또 지옥을 상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야 했다. 그때 아버지는 자식들 네 녀석 중에 하나라도 식장에 손을 잡고 들어가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결국 나는 헤어졌었던 그 오빠와 한 달 만에 식을 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나는 독하게 준비를 했다. 석사 졸업 논문과 결혼 준비와 입사 준비를 3개월 만에 해치운 것이다. 졸업 논문 디펜스 이틀 뒤에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2주 뒤에는 입사를 했다. 그 오빠와 함께 산 6년은 나에게 천국의 문을 열고 만난 지옥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기분이 좋아지신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무사히 이겨 내시고 다시 건강을 되찾으셨다. 나는 박사 진학을 포기하고 그 오빠와 같은 회사에 취직해서 회사 앞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딸들은 집에서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보던 엄마의 모습만 보아 왔다. 나 역시 외식 한번 안 하고 알뜰하게 집을 보살피는 엄마를 보면서 자라왔다. 유부녀와 동시에 직장인이 되었던 나는 가사도 일도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이러한 나와는 다르게 주말이면 그 오빠는 부지런이 움직이지 말고 늦잠을 자라면서 나를 재웠다. 점심때쯤 일어나면 근처에 브런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주말마다 일찍 일어나서 밥을 차리고 치우고를 반복하던 엄마의 삶과 너무나도 달랐다. 이것이 천국이고 행복인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천국은 길게 가지 않았다. 곧 시댁은 파산하여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회사를 마치고 빚쟁이가 찾아올까 무서워하면서 퇴근했다. 그 오빠는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나를 호되게 혼냈는데, 그때 이후로 그것이 더 심해졌다. 나는 왜 혼나야 하는지 모른 채로 매일매일 죄인이 되어갔다.
지옥 같은 생활을 청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해 보았는데, 결국은 헤어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의 고마운 뇌가 기억을 잘 지워주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대체 남자 보는 눈은 어떻게 기르는 걸까? 30대 중반이 지나가는 지금도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알게 된 것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똑똑하고 돈이 많은 것이 나와 잘 맞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나랑 잘 맞는 사람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가끔 그사람을 생각하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자친구랑 데이트하다가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오빠야~ 잘지냈나? 인사해라. 여긴 내 남자친구고, 여기는 그냥 옛날에 알던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