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이토록 평화로운 마음이라니
오래된 친구들과의 후쿠오카 여행 3일째 아침이었다. 분명 아침 일찍 일어나 츠케멘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어쩐지 아무도 일어날 기미가 없다. 2층 침대가 2개 놓인 방 안에는 앓는 소리마저 들려오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나와 같은 침대 1층에서 잔 낭만이가 아프단다.
다른 2층 침대는 여전히 새벽 4시쯤이다. 조용히 혼자 일어나 세수와 양치를 속성으로 끝마치고 숙소를 나섰다. 잠깐 츠케멘을 먹으러 갔다가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씻을 참으로 감지 않은 머리는 캐리어에 챙겨 온 모자 속에 감췄다.
6월, 초여름의 초록과 파랑이 감격스럽기까지 한 아침이었다. 누군가는, 어쩌면 한국에 있었다면 나도 출근을 했을 아침이건만 아침의 여유를 한껏 즐기며 길을 잡았다. 초록불에 길을 건너 하카타역으로 걷는데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편안함에 이질감을 느꼈다. 여긴 지금 외국이고, 나는 혼자인데 어째서 이토록 평화로울까. 늘 걷던 길을 걷는 양 생각 없이 걸어도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익숙함과 매일 보는 풍경을 보는 듯한 정겨움이 느껴지는 길 위에서 순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네가 느낀 익숙함이니, 정겨움이니 하는 것들은 다 상상에 불과하다는 듯 귓속으로 일본어가 쏟아져 들어왔다. 하카타역에 가까워질수록 눈에 띄게 늘어난 사람들이 동료와, 가족과, 또는 연인과 나누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주워들으며 생각했다.
'아, 여기는 후쿠오카였지.'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는 편안함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으로 간 해외여행도 후쿠오카였고, 가장 많이 다녀온 해외 도시도 후쿠오카이니 말이다. 특히 부산에서는 쾌속선으로 약 3시간만 배를 타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비행기로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이 바로 후쿠오카였다. 또 도쿄나 오사카처럼 큰 도시는 아니라서 다리만 튼튼하다면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쇼핑, 맛집, 카페가 모두 집약적으로 모여있어서 일본의 어디로 떠나야 한다면 가장 먼저 꼽을 정도로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런 까닭에 한일 관계가 얼어붙고 나서는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찾았어도 익숙함이란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출근하는 직장인 사이에 섞여 있었던 '연차 쓰고 휴가온 자'의 은은한 승리감도 있었다. 원래 논다는 게 남들 놀 때 노는 것보다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더 즐거운 법이니까.
쉬는 날이지만 부지런히 일어나 내가 여기에 와서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으러 가는 길의 행복감이 이날 아침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으리라. 초록초록하던 가로수도, 파랑파랑하던 하늘도, 꺄르르 웃는 듯하던 일본어들도 모두 다 나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었겠지.
결과로만 말하자면 츠케멘은 먹지 못했다. 하카타역에 있는 멘타이쥬 매장은 팝업이었고, 츠케멘은 밀키트로만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 떨며 1등 손님으로 줄을 섰건만 내 손에는 츠케멘 밀키트만 덜렁 들려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면 뭐 어때. 이날 아침의 평화로움은 오로지 나만 느끼지 않았던가. 함께 떠난 여행에서 나 혼자 느꼈던 작은 평온함이 사진만 봐도 짙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