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모든 업무는 가느다란 줄로 연결되어 있음
현재 내 업무는 조직문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같은 업무를 했냐고 묻는다면, NO! 이전에는 무역사무도 했고, 총무도 했고, 홍보 업무도 했었다.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은 업무들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얽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사람의 앞날이란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무역사무
이건 내 첫 직장에서의 첫 업무였는데 단순히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맡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2년 정도 공기업 준비를 했었다. 취준생으로 2년을 살면서 전공이나 영어를 준비했고, 내 꿈의 직장이던 인천국제공항공사에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연달아 통과하는 행운과 면접에서 떨어지는 불운 끝에 깔끔하게 공기업을 포기했다. 막상 사기업으로 눈을 돌리니 나이는 많고, 경력은 전무해서 구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무역사무 신입을 뽑는 회사에 지원을 했고 다행히 합격.
첫 회사는 3년 4개월을 다녔는데, 사람들이 정-말 자주 그만둬서 처음에는 무역사무만 했지만 나중에는 공석을 메우느라 총무나 인사 업무를 일부 봤던 것이 가느다란 끈의 시작이었다.
총무 그리고 조직문화와의 만남
다니던 회사가 재정난을 겪으면서 휘청휘청했다. 그때는 전화만 받으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할 정도로 거래처에 줘야 할 대금이 밀린 상태였다. 결국 퇴사를 선택했고, 운 좋게도 내가 그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퇴직금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퇴사 후 약 6개월 정도 강제로(?) 쉬었는데, 생각보다 취직이 안 됐다. 당시 4년 차였으니 굉장히 잘 팔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 비슷한 시기에 2개의 회사에 최종 합격했는데 첫 번째는 잘 아는 일이지만 그래서 지루할 것 같은 회사였고, 두 번째는 도전일 것 같지만 그래서 재밌을 것 같은 회사였다.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4년 반 동안 정말 재밌게 다닐 수 있었다. 비록 마지막에는 번아웃이 와서 그만두어야 했지만.
아무튼 두 번째로 가게 된 회사에서의 최초 직무는 총무였다. 다만 이 회사에서는 총무에서 조직문화 업무를 꽤 많이 맡고 있었다. 행사나 캠페인을 통해 문화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일을 시작했는데 이게 또 나에게 꼭 맞는 옷이었던 거다. 특히 당시 지사장님은 내게 '네가 하는 일은 인터널 브랜딩이야.'라는 걸 처음 알려준 사람이었고, 그를 통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또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조직문화 업무가 메인이 되었을 때는 사실 '조직문화'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내가 생각해 내는 아이디어들과 방향이 조직의 방향과 일치했고, 때로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수긍하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의미를 부여하면서 항상 그 의미와 수혜자에게 집중했다.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지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직문화 담당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깊이가 부족하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마치 그립 따위는 배워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알고 보면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천재적인 야구선수처럼. 다만 조직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일을 하던 내게 점차 조직, 관계, 문화, 가치 등에 대한 고민이 생겼고,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그것들이 하나둘씩 정립되기 시작했다.
커뮤니케이션 업무
조직문화를 메인으로 맡고 있다가 리더의 제안으로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병행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 1부터 10까지 라고 한다면 기존에는 내가 1에서 7까지 진행하고 8에서 10까지를 커뮤니케이션 담당자가 했다면 이제는 1부터 10까지 전부 맡아보면 어떠냐는 제안. 새로운 분야로의 도전은 설렘과 두려움을 동반했지만 늘 성장하기를 바라는 내 욕심에 결국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부턴 트렌드에 끊임없이 매달렸다. 항상 사람들을 지켜보고, 업무를 하는 시간이든 아니든 일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무조건 스크랩하고 봤다. 이걸 어떻게 하면 콘텐츠화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니 조직문화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도 시야가 확 트였다. 내가 늘 유지하던 수준의 관점이 갑자기 2배 이상 넓어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내 개인 SNS에서 끊임없이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짬밥에 트렌드를 쫓는 노력을 더했더니 제법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긴 했다. 내가 발행한 콘텐츠를 보고 라디오 작가가 섭외 연락을 준 적도 있었을 정도.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와 함께 손발을 맞추고 나를 뒤에서 밀어주거나 내가 손을 잡고 끌고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났다. 새로운 사람들이 쏟아졌고, 경영진이 바뀌면서 점차 회사의 문화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때가 아마도 업무 담당자로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기존의 문화를 유지하며 변화를 가미하는 자(나)와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은 자(뉴페이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이어졌다. 끊임없는 신경전을 펼치며 싸웠지만 사실 나는 나를 의심했었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바, 믿는 바가 맞는 것인지 확신과 의심을 오갔고 그런 상황이 길어지면서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다. 번아웃이었다.
다시 총무 그런데 조직문화를 한 스푼 섞은
안식년을 갖는 마음으로 새로운 회사를 다녔다. 아무래도 직전 회사와는 규모 차이가 크다 보니 내 맨파워를 100이라고 한다면 60 이상을 쓰지 않아도 충분했던 곳이었다. 내 역할은 총무였지만 조직문화를 놓지 않았다. 인터널 브랜딩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거니까. 무엇 하나를 사더라도, 단 한 줄을 쓰더라도 철저히 회사의 키 컬러, 핵심가치, 슬로건을 적용시켰다.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야금야금 그런 것들을 쌓아갔다. 물론 지금도 그들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조직문화라는 것은 그 존재를 모를 때는 그것의 가치를 전혀 느낄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잊기 십상이고 형태가 없어서 변하거나 망가지기 쉬운 것들을 끊임없이 정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흡수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조직문화 담당자가 아닐까.
진짜 조직문화 담당자
이번에는 정말 어떤 업무도 섞이지 않은 순수 조직문화 담당자가 되었다. 다만 이전에 내가 다녔던 회사들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의 회사라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든다.
새로운 조직을 배우고 섞이며 만들어가는 일은 즐거울 것 같다. 다만 상명하복이 분명하고,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서 얼마나 내 뜻을 융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늘 그랬듯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나와 조금 다르더라도 흡수하면 된다. 어떤 경험도 무의미한 것은 없으니.
결과적으로 내 커리어는 진화와 퇴보를 반복하는 듯했지만 사실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었다. 내가 일을 쉬었다고 0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일을 했다고 -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경험하는 것들은 그 크기가 작든 크든 또는 모양이 제각각이든 계속해서 쌓이고, 전혀 달라 보여도 엮기만 하면 다 연결할 수 있다. 무역사무로 시작해 총무, 인사, 기획, 영업, 브랜딩, 조직문화, 홍보업무를 두루 맡았고 그 안에서 모든 경험을 활용했던 내 커리어 패스처럼. 앞으로의 10년도 그렇게 나아가야지.